서 론
오늘날의 의료는 사회 구성원 모두가 관심을 가지고 있는 사회적 실천의 문제가 되었다. 또한 여타의 다른 전문직과 마찬가지로 의사들에게서 드러나는 특성은 사회, 문화, 역사 그리고 경제의 시대적환경에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는 것도 당연하다. 사정이 이와 같다면 미래의 의사들이 급변하는 의료환경에 따라서 시대적 요구에 부합하는 의사를 양성하기 위해서 다양한 사회적 역량을 교육하고 실천하는 것이 필요하다.
우리의 언어체계에서, 말하자면 한글 ‘의사상’은 오늘날 한국의 의사가 갖고 있는 집단적 특성 또는 바람직한 의사에 대한 의미를 담고 있는 개념적 용어를 뜻한다. 따라서 ‘한국의 의사상’의 내용은 보다 구체적이고 명확하게 규명되어야 할 필요성이 있다. 왜냐하면 ‘의사상’을 해석하는 주체에 따라 그 의미가 다양하게 해석될 수 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의사는 그것을 의사 전문직의 규약 또는 상징적인 목표집으로 해석하는 반면에 환자나 사회는 그것을 의료에 대한 사회의 희망과 염원을 담은 것으로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늘날의 의료는 사회적 실천의 문제가 되었다. 게다가 의료는 국민의 기본권에 속할뿐더러 사회적 제도로서 확고히 뿌리내리고 있다. 이와 같은 현실에서 의사는 종래의 임상가로서의 진료능력뿐만 아니라 보다 거시적인 차원의 다양한 능력도 갖추어야 하는 시대 상황에 놓여 있다고 할 수 있다.
의사의 역량을 임상적인 것과 비임상적인 것으로 구분하는 것은 매우 인위적일 뿐만 아니라 임의적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리스 철학에서 말하는 실천(praxis)의 의미를 올바르게 되새긴다면 의사전문직에서 임상적 역량 이외의 역량 또한 이미 의료에 포함되어 있는 요소라고 해석할 수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의사의 포괄적 역량(global role of doctor)은 의사의 임상적, 비임상적 그리고 사회적 역량 모두를 종합하고 아우르는 것을 의미하고, ‘한국의 의사상’은 바로 그와 같은 의사의 포괄적 역량을 가리킨다.
세계의학교육연맹은 국제적인 사업의 일환으로 가치와 덕목을 바탕으로 하는 비임상적 역량과 임상적 역량 모두를 포함하는 포괄적인 역량을 나라별로 규명하도록 하였다(World Federation for Medical Education, 2010). 하지만 영어 단어 ‘global’은 포괄적이라는 의미 외에도 ‘국제적, 세계적, 일반적’ 등으로 다양하게 해석될 수 있고, 이러한 사정은 다른 나라들도 마찬가지다. 따라서 ‘global role’을 ‘포괄적 역량’으로 해석할 경우에 초래되는 애매성과 의미의 혼돈을 막기 위해 의사의 ‘미래 역량(future role)’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 우리나라 또한 의사의 역량을 규명하고 규정하기 위한 국제적인 노력에 부응하기 위해 지난 4년간 ‘한국의 의사상’을 설정하는 노력을 지속적으로 수행하였다. 따라서 본 논문에서는 우선 의사상의 현대적 의미와 우리나라 의사나 의료가 갖고 있는 시대적 특성을 고찰하고, 다음으로 2014년 초에 완성된 ‘한국의 의사상’ 의 내용을 축약하여 소개하고자 한다. 본 논문의 영문제목도 영어단어의 혼선을 피하기 위하여 포괄적 역량(global role) 대신 미래역량(future)으로 사용하였다.
의사상의 의미
본 논문에서는 의사상에 대한 의미를 세계의학교육연맹이 추구하는 의사의 포괄적 역량과 같은 뜻으로 사용하고자 한다. 현대의료의 사회적 실천(social practice)이라는 개념하에서 의사의 포괄적 역량은 곧 우리나라 말로 ‘의사상’을 가리키기 때문이다. 의사상은 의사 전문직과 사회가 모두가 합의하여 수용할 있는 의사의 ‘덕목(virtue)’과 ‘역량(role)’에 대한 기술이다. 따라서 의사상은 의사의덕목을 강조하는 가치(value)와 윤리적인 측면의 의무(duty)에 대한 선언적인 기술이며, 이것은 바로 의사의 직무에 대한 직/간접적인 설명과 지침을 제시한다. 일반적으로 역량이란 특정 직무를 수행하기 위한 행동적인 절차와 실천을 위한 도구를 의미한다. 상징적이고 가치추구적인 의사의 덕목과 역할에 대한 합의와 정의를 마련하였다면, 다음으로 그것을 구체적으로 실현시킬 행동적 규준을 제시해야한다. 구체적인 행동적 내용은 의사로서의 의무를 제시하며 추상적인 내용은 바람직한 가치에 대한 설정으로 의사가 펼치는 의료의 기준(standards)이 된다. 이러한 기준은 특정할 수 있는 부분을 다시 역량(competency)으로 구분하여 의사를 양성하는 모든 주기에 적용할 수 있는 의학교육의 공통목표가 된다. 말하자면 의사상은 곧 국가적 단위의 윤리를 바탕으로 하는 의료의 기준과 교육목표로 받아들여져야 한다(Ministry of Health and Welfare, 2014).
전통문화유산의 의사상
우리나라의 경우 서양 의학이 도입된 이후로 의사 전문직이라는 개념이 생겼기에 서구에 비해 그 역사가 짧다고 할 수 있다. 서구적 의미의 의사가 정립되기 전의 우리나라의 의업은 복잡한 한문을 이해할 수 있는 일부 소수의 계층에 한정되어 교육되었고, 유교적전통에서 생계를 위한 수단으로 하는 의업은 천박한 것으로 간주되었으며, 심지어 수익을 전재로 한 진료는 도둑질이라고 표현하기도 하였다. 예컨대 정양용은 유배 시절 500권이 넘는 저서를 남겼고 유배지에서 의사로서 역할도 하였다. 문중이나 지역의 주민에게 의학적 지식을 제공하는 것이 선비의 의무였기 때문이다. 동아시아의 유교문화의 전통은 전문직으로서 의사의 정체성을 추구하기보다는 선비계층으로서 문화적 동질성을 추구하였고 직능별로 수직적 개념의 전문직업화를 배척하였다. 당연히 의사 전문직 단체는 결성되지않았다. 전통적인 유교문화 속에 의업은 선비계층의 사회봉사적 개념이었고 소수의 전문직화한 의원이 궁중에서 전업으로 봉직하였다. 하지만 이것 역시 가정을 잘 다스리고 국가에 충성한다는 전통적인 유가개념의 관직으로 수평적 개념의 정체성을 추구하는 것이지 생계 유지를 위한 수직적 개념의 전문직화와는 거리가 있다.
식민문화유산의 의사상
일제 강점기 동안 전통적인 직업 분류에 의한 전통적인 사회적 계층의 이동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의(醫)와 법(法) 등 서양의 전문직이 본격적으로 도입되었고, 서양의 과학과 기술로 무장한 새로운 계급이 기존의 사(士)층 계급을 대신하게 되었다. 일제는 근대적 국가의 경영에서 전문직이 필수적인 요소임을 깨닫고 있었기에 소수의 조선인들을 고등교육에 편입시켰다. 하지만 일제는 조선인의 이성적 진보를 경계하여 고급기술과 인문학적인 배경에 대한 교육은 의도적으로 제외하는 등 차별적인 교육을 제공하였다. 우리나라보다 일찍이 서양문물을 도입한 청나라는 이미 과학과 기술 중심의 서양문물 도입의 위험성을 경고하였고 물질주의를 팽배하게 하는 위험요소로 간주하였다(De Bary & Lufrano, 2000). 그러나 식민조선사회는 서양의 과학과 기술에 압도당하여 서양문물에 대한 이렇다 할 비평 없이 식민교육을 서양교육으로 착각하고 수용하였다(Ahn, 2011). 우리의 전문직 역사는 불행히도 식민지 경영을 위한 인력양성의 도구로 사용되었다. 한편 일본의 식민정책의 일환으로 시작된 교육과 함께 서양종교의 진출에 의한 교육은 사립고등교육의 발전을 도모하였고 인류에 대한 서양식 보편적 가치의 도입과 함께 특히 여성의 해방에 지대한 역할을 하였다.
일제 강점기 동안 2천만 조선인을 위한 의사의 수는 극히 적었고 응급상황에서의 서양의학의 괴력 앞에 의사는 자연스럽게 별 어려움 없이 경제적 보상을 즐기며 소자본가로 성장하였다. 전통적인 농경 사회에서 지주를 제외하고는 자본 축적을 경험하지 못한 조선인이 의사가 된다는 것은 경제적으로 성공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의료자본가의 성장은 해방 이후 신설의과대학의 설립으로 이어져 급속한 경제적 성장 속에 의학교육의 사립화를 이끌었고 의사교육에 대한 공적인 개념이 발달하는 것을 가로막는 현상을 초래하였다.
사립주도 의학교육과 의사상
우리나라는 현재 41개 의과대학이 있으며, 그 중 31개가 사립대학으로 전체 의과대학의 약 75% 이상을 차지하고 있다. 반면에 일본의 경우 전체 의과대학 중 75%가 공립으로 운영되고 있으며 약 25%만을 사립대학이 운영하고 있다. 우리나라의 경우 사립의과대학이 교육을 담당하는 비율은 세계에서 가장 높다. 우리나라의 경우 미처 의학교육의 공적 특성이 파악되기도 전에 의학교육의 사립화가 이루어졌고, 이것은 현재 세계적으로 문제가 되는 의학교육의 상업화와 사립화의 논의가 한 세대 앞서 이루어지는 역설적인 시대착오적 현상을 초래하였다. 우리의 경우 의사를 양성한다는 것은 곧 의학지식을 보유한 전문가를 기르는 것으로 인식하였고, 이는 다시 의료를 소규모 자영업으로 인식하게 만들었다. 달리 표현하면 우리나라의 의료는 과학과 기술의 발전에만 모든 역량과 관심을 집중한 결과 의학교육과 의료에 대한 공적 가치와 공공의 개념이 전무한 상태로 발달되었다는 것이다.
해방 이후의 상황도 그 전과 크게 다르다고 할 수 없다. 미국은 세계 유일의 순수자본주의 국가체제를 갖고 있을 뿐만 아니라 최고의 과학기술을 보유한 나라이기도 하다. 미국의 의료과학기술과 자본 중심의 의료정책 및 환경에 크게 영향을 받은 우리나라는 다시 미국의 선진의학기술을 도입하는 것을 최우선의 사명으로 여겨 의학교육과 의료에 대한 공적 개념을 성장시킬 기회를 상실하게 된다. 당시에 많은 의사들이 미국으로 이주하였다. 이것은 그들이 미국의 의료제도가 안고 있는 어두운 측면보다 미국 내 의사의 지위와 권위를 동경하였기 때문이다. 의사가 국제적으로 이동하는 것의 장점도 분명히 있다. 미국의 선진 의료교육은 우리나라의 전공의 교육과 접목되어 현재의 전문의 제도를 낳았으며, 선진 의료기술의 수입은 우리의 의학기술이 세계 최고의 수준에 오르는데 기여한 바가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미국 방식의 전공의 제도를 채택한 우리나라 의사의 전문직업성은 의료 환경이 다른 우리나라에서 매우 다르게 발전하였다. 말하자면 우리나라는 미국 의료환경의 외형과 기술의 동등성은 확보하였으나 그것을 뒷받침할 의료의 사회적 실천에 대한 가치는 미국과 매우 다르게 정착되었다.
거대자본과 대형병원: 의사상의 추락
의사가 자영업자로서 경제적인 성공을 이루게 된 현상은 의학교육에 여러 가지 부정적인 결과를 초래하는 원인이 되었다. 말하자면 높은 학업성취도를 보인 학생들이 의과대학 입학을 목표로 하였고, 이것은 다시 중등교육의 비정상화를 초래하였다. 게다가 많은 대학들은 고등교육사업의 경제적 성공을 담보하기 위해 자본을 축적한 의사의 병원을 모체로 하여 의과대학을 설립하거나, 최근에는 심지어 재벌의 거대자본에 의거하여 경쟁적으로 의과대학을 설립하였다. 더불어 종교집단의 경제적인 성공도 의과대학설립의 교육사업의 투자를 이끌어 내었다. 이것은 겉으로 보기에 비록 설립 주체가 대학, 병원, 재벌 그리고 종교단체와 같은 개별적인 사회적 단위에 의한 투자인 것 같지만, 바탕에 깔려있는 근본적인 요인은 의과대학 과 의료사업을 통한 학교수익의 증대를 발판으로 계속된 기관성장이 주된 목표인 것으로 보인다.
최근의 재벌에 의한 대학병원의 대형화는 의료계가 소자영업자의 성공에서 경험하지 못한 의료산업의 거대산업화와 거대자본화를 경험하게 되었고 의료인의 노동계급화를 촉진하고 있다. 이러한 환경에서 의사는 직접적인 육체적/정신적 노동뿐만 아니라 관리자의 역할도 요구받고 있으며, 교육기간도 고등학교 졸업 후 통상 11–13년으로 여타의 다른 일반직에 비해 현격히 길다. 물론 의사도 의료업무를 한다는 점에서 노동자다. 하지만 의사가 고급 노동 계급화가 되는 과정에서 의사전문직이 갖는 전문직업성이 함께 훼손되고 있다는 것이 문제다. 특히 경영논리에 의한 임상자율권의 훼손은 과잉진료 및 터무니없이 짧은 진료시간이라는 폐해를 낳고 있다. 여하튼 우리의 의료는 현재 거대의료기관을 지향하고 있으며, 그것이 궁극적인 목표인 것처럼 바뀌고 있다. 요약하자면 우리나라는 일제 강점기의 강압적인 분위기에서 의사양성이 시작되었고 해방 이후에는 극우 군사정권에 의해 채택된 의료정책과 지난 한 세대 거대자본의 비영리 의료시장 개입에 의한 역설적인 경영논리 지배구조의 혼돈속에 의사양성이 되고 있다(Kwon et al., 2012).
의료의 사회적 실천시대 의사상:
오늘날의 의료는 의사와 환자의 개인적 관계에서 사회 모두가 참여하는 사회적 실천으로 변모하였다. 이것은 의료에 대한 국민보험이 도입되면서 환자뿐만 아니라 환자 이외의 사회 구성원 모두가 잠재적인 환자로 간주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의료가 의사의 전유물이 아니라는 것은 당연하다. 의료는 사회를 구성하는 구성원과 사회에 영향을 미치는 경제, 문화, 역사, 정치 등 다양한 요인에 의해 영향을 받는다.
민주화가 이루어진 이래 우리나라에서는 의료를 중심으로 다양한 문제들과 심각한 갈등들이 표출되고 있다. 의료인, 환자, 그리고 정부 등 모두가 이제 의료의 직/간접적인 이해당사자가 되었다. 이것은 긍정적인 시각에서 의료가 이제 국민의 일상과 관련된 생존을 위한 기본권으로 발전하였다는 증거로 볼 수도 있다(Ministry of Health and Welfare, 2014). 하지만 우리의 경우 민주화의 성취와 발전이 아직 선거제도의 확립에 그치고 선진화한 의회정치를 보여주지 못하고 있듯이, 의료에 대한 근본적인 철학적 사고나 의료기술의 발전에 상응할 만한 사회적 논의는 매우 감각적이고 초보적인 수준에 머물러 있다.
의료는 공익적이며 사회 구성원 모두를 위한 것이기에 결코 값싼 대가로 얻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무상의료라는 그럴듯한 구호에 따른 선심성 정치는 사회적 위해를 가할 수 있다. 또한 의료에 대한 거시적인 조정기능을 마련하지 않은 채 의료가 상업성과 산업성을 근거로 한 창조경제산업으로 둔갑되어 의료를 통한 경제적 이득, 특히 국가적 이익의 창출이 목적이 될 경우 의료 직종의 전문직업성이 크게 훼손될 수 있다. 그렇다고 하여 대형화되고 있는 병원의 이점을 간과할 수는 없다. 이제 의사는 작은 의원 단위에서 거대병원의 경영까지 이해하고 참여할 수 있는 역량을 갖출 것을 요구받고 있다. 그럼에도 의사의 본연적인 임무는 환자의 진료뿐만 아니라 의료와 의료를 뒷받침하는 제도가 의료의 본래 가치와 취지를 훼손되지 않도록 주의하고 경계하는 것이다.
의료는 사회적인 문제이기 때문에 의료의 복잡성과 복합성은 경제, 경영, 정치 등 특정 단일 시각으로 설명될 수 없다. 그러므로 의사집단은 의료가 사회적 실천의 현상에서 다양한 집단의 특정적인 입장에 휘말려 의료 본래의 가치가 손상되지 않도록 최대한의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따라서 의료가 사회적 실천으로 나타날 때 의사에게 필수적으로 대두되는 역량이 바로 사회적 역량이다(Ministry of Health and Welfare, 2014). 의사는 의료를 가장 잘 이해하는 전문집단이고, 실제로 환자에 대한 가장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따라서 의사는 가장 높은 수준의 직무윤리를 요구받는다. 달리 말하면 의사가 의료를 제공하는 가장 상위적인 위치에 놓여 있다는 데에는 이견이 없다. 하지만 의사는 의과학적 지식 이외의 영역에 대해 상대적으로 문외한일 수 있으며, 따라서 의료에 대한 특정 사안이 대두되었을 경우 사회의 다양한 계층의 집단 합의를 필요로 할 때 그들과 올바르게 의사소통할 수 없는 경우들이 발생하기도 한다. 심지어 자기중심적 사고에 의한 서툰 협상의 결과가 항상 비상대책 위원회를 소집하고 회의 불참선언으로 이어져 의사집단의 주장이 마치 이익집단의 자기방어로만 비추어지는 현실도 반드시 극복되어야 한다. 의사는 환자와의 의사소통도 중요하게 생각해야 한다. 하지만 거기에 더하여 의사는 의료제도와 정책적인 측면에서 의료를 위한 정직하고 옳은 입장이 있다면 정확하게 전달할 수 있는 의사소통 역량과 대사회적 그리고 정치적 역량도 함께 갖추어야 한다는 것이다(Kwon et al., 2012).
결 론
1. 의사상과 의학교육
의료가 사회적 실천으로 정착된 지금도 우리사회는 여전히 ‘의술은 인술’이라는 시대착오적인 의사상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물론 인술의 근본적인 가치는 시대를 초월한다. 그러나 사회적 실천의 시대에는 보다 명확하게 규명된 의사에 대한 역할과 가치관이 제시되어야 하며, 이러한 경향은 이미 거스를 수 없는 세계적 추세다. 일찍이 영국은 두세 대 전부터 의사의 직무에 관련된 기준을 제시하였고 이것이 바로 의사상과 의학교육의 목표가 되었다. 영어권 문화에서는 매우 구체적이고 분석적인 의료의 기준을 마련하여 그 개념을 전파한 결과 영국뿐만 아니라 미국, 캐나다, 호주에는 자체적인 의사상에 준하는 기준과 목표를 제정하였다(Australian Medical Council, 2009; General Medical Council, 2013; Institute for International Medical Education Core Committee, 2002; Royal College of Physicians and Surgeons of Canada, 2005).
우리나라의 의사상을 만드는 작업은 21세기의 의학교육을 대비 하기 위하여 한국의과대학장협의회에서 출간된 ‘21세기 의학교육에 관한 보고서’가 효시가 될 수 있다. 그러나 후속작업이 진행되지 않아 현재는 거의 사용되지 않고 있다. 2008년 한국의학교육평가원은 우리나라 전공의 교육의 공통역량에 대한 과정을 출간하였다. 당시는 의사면허 발부 100주년을 기념하기 위한 뜻있는 해여서 이것을 ‘전공의 공통역량 respect 100’이라고 명명하였다. 이들 의사상이 보여주는 내용은 의사와 환자의 관계를 종래의 진료적 관계로만 파악하는 것이 아니라 의사의 전문직업성 강화와 의사의 사회적 역량을 강화하여야 한다는 것이다(Ministry of Health and Welfare, 2014).
영국은 사회적 역량을 비임상적 역량으로 표기하고 있으나 타학문분야는 이미 비임상적으로 분류된 역량을 사회적 역량으로 규명한 바 있다. 의사상의 제정은 이제 국제적으로 확산되어 급기야는 세계의학교육연맹이 이제 모든 나라에게 각 나라에 맞는 의사의 역할과 덕목을 규명하여 볼 것을 요구하고 있다. 의사상을 제정하는 것은 현 시대의 의사의 역할과 덕목에 대한 철학적 고찰과 함께 의학교육이 나아갈 방향을 제시하는 중요한 작업임에는 논의의 여지가 없다. 우리나라도 지난 2011년부터 의사상 제정을 위한 꾸준한 작업을 하여왔고 2014년 봄에는 임시적으로나마 사용가능하고 적용 가능한 의사상을 출간하였다(Ahn, 2014). 다양한 참여자와 다양한 기관의 검수를 거쳐 제작한 우리시대의 의사상은 어떤 의사가 양성되어야 하는가를 제시하고 있다. 의사상에서 제시된 각 영역의 세부사항은 학습목표로 전환되어 성과바탕교육의 근본을 제시하고 성과는 까다로운 측정을 거쳐 역량으로 전환시킬 수 있다. 그러므로 의사상의 설정 자체는 현재적 개념의 의학교육의 추세와 궤를 같이 하는 작업이기도 하다.
2. 새 시대의 의사상
한국의 의사상은 우리나라 의사들이 갖추어야 할 미래지향적이고 포괄적인 역량을 기술하였다. 크게 환자진료, 소통과 협력, 사회적 책무성, 전문직업성, 교육과 연구의 5개 영역으로 구분하고 각 영역이 정의와 해설 그리고 하부 역량군에는 세부역량을 기술하였다(Ministry of Health and Welfare, 2014). 간혹 중복된 세부역량은 역량의 중요성을 감안하여 표현이나 강조하는 바를 달리한 경우 반복도 수용하였다. 새로운 세대의 교육을 위한 한국의 의사상 제시는 본 논문의 성격과 양적 제한으로 자세한 소개보다는 의사상의 요약을 다음과 같이 제시하였다.
1) 환자 진료
의사는 환자의 건강과 안전을 최우선으로 여기며, 한국의 의료체계와 상황 안에서 환자와 사회의 신뢰를 바탕으로 최선의 진료를 할 수 있는 역량을 갖추고 이를 유지·발전시킬 수 있어야 한다.
(1) 의학지식 및 임상술기
전문적인 의학지식과 적절한 임상술기능력을 갖추어야 한다.
환자의 상태를 파악하고 진단, 치료하는 과정에서 환자 중심의 태도를 견지하며 정확한 의학적 판단과 적절한 임상적 결정을 내릴 수 있어야 한다.
진료는 과학적 근거에 바탕을 두고, 환자의 개별성을 고려해야 한다.
진료와 관련된 결정 시에 정보제공, 교육, 상담, 동의서 받기(informed consent) 등의 활동을 통해서 환자의 의견을 존중해야 한다.
환자에 대한 개인정보 보호 의무를 준수해야 하며, 의무기록과제 증명서 발급에 관련된 내용을 숙지하고, 이를 진실하고 정확하게 기록해야 한다.
진료과정에서 통증과 고통으로 인해 환자의 삶의 질이 저하되지 않도록 적절하게 대처해야 한다.
2) 소통과 협력
의사는 환자, 보호자, 의료진 그리고 사회와 상호 소통하고 협력해야 한다.
4) 전문직업성
의사는 인간의 건강과 생명을 위해 헌신하는 전문직업인으로서 전문적인 직무규범과 자율규제를 바탕으로 높은 수준의 직무윤리를 유지해야 한다.
3. 맺음말
한국의 의사상에서 제시하는 내용을 의과대학이나 전공의 교육만으로 온전하게 완성할 수는 없을 수 있다. 특히 사회적 역량은 평생전문직업성개발로 꾸준히 다져가야 할 역량이다. 그것은 의사상이 미래지향적이고 포괄적인 이유이기도 하다. 한 시대의 의사와 의사집단이 보여주는 특성은 다양한 요인에 의하여 결정된다. 의과대학을 지망하는 학생의 특성과 시대적, 사회적, 문화적 환경 그리고 의료를 통하여 얻어지는 경제적 보상제도 등이 동일한 시대를 살고 있는 의사와 의사집단이 추구하는 가치와 밀접한 관계를 갖는다. 결국 한 시대의 의사상은 특정한 시대의 의학교육과 당시 사회의 보이지 않는 암묵적인 협상관계에서 결정된다. 말하자면 사회가 원하는 의사와 실제로 사회가 만들어내는 의사 사이의 괴리와 합치의 정도 여부는 바로 우리 사회와 의학교육의 현실을 그대로 투영하고 반영하는 시대적 자화상이기도 하다(Ludmerer, 1999). 새 시대의 바람직한 의사를 양성하기 위해서는 의사나 의사집단의 내부적이고 독단적인 노력보다는 사회와의 끊임없는 교감과 설득, 그리고 건설적인 대화를 통하여 의사양성 역시 사회적 실천으로 전환되어 사회가 투자하고 사회가 바라는 좋은 의사가 양성되어야 한다. 한국의 의사상은 곧 후속작업으로 우리나라의 의학교육과 연계되도록 의사상을 바탕으로 우리나라 의사에게 꼭 필요한 핵심역량을 도출하여 전문직과 사회가 모두 바라는 의사의 양성을 위한 교육의 목표와 성과로 설정할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