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 론
“저는 여러분들에게 앞으로 10년간 의학계에서 일어날 가장 큰 혁신을 소개하고자 합니다. 그것은 바로 사람을 만지고, 편안하게 하고, 진단하고, 치료를 하는 사람의 손이 가진 위력입니다.” 이 문장은 스탠포드대학교 내과 교수인 베르기즈(Abraham Verghese)가 2011년 TED (technology, entertainment, design) 강연에서 한 말이다(Verghese, 2016).
2016년 3월 대한민국 국민들의 관심을 집중시킨 바둑기사 이세돌과 인공지능 알파고의 대결은 수많은 화제를 불러일으키면서 뉴스의 초점이 되었다. 그 후로 가까운 미래에 ‘의사, 변호사, 기자, 통・번역가, 세무사, 회계사, 감사, 재무설계사, 금융컨설턴트 등 대부분의 직업이 소멸할 것’이라는 주장이 줄을 잇기 시작했다. 이미 미래에 직업환경이 크게 변화할 것이라는 주장은 많았지만 이 바둑대결 이후 그런 주장은 미래가 아니라 현실로 다가왔다. 기계보다 인간의 일이라 믿고 있던 사람들에게 인간이 만든 가장 복잡한 게임이라 할 수 있는 바둑에서 인공지능 알파고가 사람 최강자를 물리치는 모습은 충격을 안기기에 충분했다.
이미 IBM의 인공지능 왓슨의 등장으로 의학 분야에서 인공지능의 사용은 미래가 아닌 현실이 되었다. 의료계에서는 왓슨의 활용이 익히 알려져 있었지만 일반인들에게는 아직 의사를 대신하는 컴퓨터 왓슨이 덜 익숙한 상태에서 이세돌과 알파고의 바둑 대결 소식은 의료계에서 인공지능이 미래의 의료사회를 어떻게 변화시킬 것인가에 대하여 계속해서 주의를 집중시키고 있다. 구글에서 바둑 대결을 기획한 것이 조만간 의학지식을 지닌 인공지능 알파닥터가 등장할 수 있음을 예고하는 가운데 본고에서는 이러한 인공지능의 등장이 미래에 지금과는 전혀 양상이 달라질 의료사회에서 활동할 의사들에게 어떤 소양을 갖추어야 함을 요구하는지에 대하여 고찰하고자 한다.
근대사회의 형성과 의학의 발전
기원전 7세기에 탈레스(Thales)는 “만물은 물로 이루어져 있다”고 했다. 그 때까지 인류는 그들이 살고 있는 세상이 당연히 신이 창조해 놓은 것이라 여겼으므로 이 세상의 구성에 대하여 아무도 자신의 의견을 내놓지 않고 있었다. 그런 상태에서 탈레스가 처음으로 자신의 의견을 피력한 것이 오늘날 그를 ‘최초의 철학자’라 하는 계기가 되었다. 탈레스의 주장이 옳을 이유는 전혀 없지만 세상에 대해 새로운 시각을 제시했다는 점에서 그의 주장은 큰 파급효과를 가져 왔다(Lloyd, 1974). 뒤를 이어 많은 학자들이 이 세상에 대한 자신들의 견해를 제시하기 시작했고, 그 와중에 의학에 대한 시각도 달라지기 시작했다.
고대 그리스의 학자들은 세상에 대한 관심이 있었을 뿐, 오늘날의 학문 분류와는 아무 상관없이 자신들만의 관심사를 생각하고, 토의하고, 연구했다. 당시 또는 그 이전에 활동한 사람들이 주로 자연현상에 관심을 가졌으니 자연의 일부인 사람의 몸에서 발생하는 이상, 즉 의학에 관심을 가진 분들이 있기는 했겠지만 의사라 할 수 있는 분들이 활동하기 시작한 것은 기원전 6세기경부터였다. 이때 그리스의 여러 섬에서 의학의 학파가 형성되었으며, 히포크라테스(Hippocrates)의 출생지인 코스섬도 그 중 하나였다. 그 섬에는 뱀이 지팡이를 감고 있는 모양으로 상징되는 의술의 신 아스클레피오스(Asclepios)의 신전이 있었고, 그의 아버지도 의사였으므로 어려서부터 의학에 쉽게 노출된 환경에서 자라났다(Longrigg, 1997). 히포크라테스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많지 않지만 그의 이름을 딴 저서를 통해 그가 의사로 활동했고, 의학연구에 관심이 많았으며, 후배 의사들을 많이 배출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당시 의사들은 환자가 있는 곳을 돌아다니며 진료를 했다. 히포크라테스 학파 의사는 환자를 치료하기 위해 증상을 관찰하는 일에 집중했다. 경험을 토대로 환자에게 예후를 이야기해 주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일이었으며, 정확한 진단과 치료법은 가지지 않고 있었다(Jouanna, 1992). 환자를 파악하기 위해 침상 옆에서 관찰하는 일은 중시되었지만 이를 의학공부를 위한 교육에 활용한 기록은 거의 없다.
1453년 이슬람 세력에 의해 서로마의 중심지 콘스탄티노플이 함락되었다. 이것으로 서양사에서 중세는 끝났다. 476년에 게르만 용병대장 오도아케르가 왕위에 오르면서 서로마제국이 몰락한 후 약 1,000년에 걸친 중세가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된 것이다. 이보다 90년 늦은 1543년 죽음을 목전에 둔 코페르니쿠스(Nicolas Copernicus)가 “천체의 운동에 관하여(De revolutionibus orbium coelestium)”라는 책을 통해 태양이 지구를 도는 것이 아니라 지구가 태양을 돌고 있다고 주장했고, 같은 해에 베살리우스(Andreas Vesalius)는 “인체의 구조에 관하여(De humani corporis fabrica)”라는 책에서 약 1,400년간 진리로 믿어 온 2세기 의학자 갈레노스 (Claudios Galenos)의 학문세계에 문제가 있음을 지적했다. 로마 황제의 의사로 검투사 등을 치료하면서 인체 내부에 관심을 가진 갈레노스는 상처 입은 사람들의 몸 내부를 들여다 볼 기회가 많았다. 학문적 호기심을 해결하기 위해 동물을 해부하여 지식을 쌓아갔고, 이를 바탕으로 그가 저술한 내용이 중세 내내 진리로 받아들여져 왔으나 시체를 직접 해부해 본 베살리우스는 갈레노스가 남겨준 의학의 전통을 단절하고, 현대의학의 창시자가 되었다(Ackerknecht, 1979). 코페르니쿠스와 베살리우스에 의해 과학에서도 중세가 끝나고 근대가 시작되었다.
새로운 시대가 시작되었다는 것은 무엇인가가 크게 바뀌었음을 의미한다. 베이컨(Francis Bacon)은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를 비롯한 고대 그리스의 학자들이 이론에만 치우쳐 올바른 학문적 업적을 남기지 못했음을 지적하면서 관찰과 실험의 중요성을 역설했다. 코페르니쿠스와 베살리우스가 오랫동안 진리로 믿어온 내용이 엉터리일 수 있음을 보여 준 후 베이컨은 학문적 태도를 바꾸어야 새로운 도약이 이루어질 수 있음을 주장한 것이다. 뒤를 이은 하비(William Harvey)는 명확한 증거를 제시하지는 못한 상태에서 실험, 관찰, 계산에 의한 추론만으로 혈액이 온몸을 순환하고 있음을 주장했다(Wright, 2012). 1628년에 발표된 혈액순환이론은 반향을 일으키기도 했으나 세월이 흐르면서 다른 학자들로부터 그게 옳을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 인정되었고, 그가 세상을 떠난 후 4년이 지난 1661년, 이탈리아의 말피기(Marcello Malpighi)에 의해 모세혈관이 발견됨으로써 완벽하게 증명되었다(Ackerknecht, 1979). 관찰과 실험을 통해 유추해낸 이론에 문제가 없다면 오래지 않아 증명이 될 수 있음을 보여 준 것이다.
20세기 과학역사학자 쿤(Thomas Kuhn)은 과학에서 혁명이 일어나는 과정을 패러다임의 전환으로 설명했다(Kuhn, 2012). 과학분야에서 일어난 패러다임의 전환이 의학에도 그대로 적용되어 베이컨이 주장한 귀납적 사고에 의한 학문적 발전이 이루어지게 된 것이다. 이로써 의학에서도 과거와는 비교가 되지 않을 만큼 빠른 속도로 학문적 발전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침상 옆 관찰의 중요성을 강조한 시드넘과 부어하브
침상 옆 교육은(bedside teaching)은 실제 환자가 존재하는 임상현장에서 이루어지는 교육을 의미한다(Kim & Lim, 2014). 오늘날에는 의학을 공부하는 학생이라면 누구나 병동에서 환자파악을 한 후 주치의와 함께 회진을 돌기도 하고, 환자를 직접 만나 이학적 검사 등을 함으로써 침상 옆에서의 교육을 체험하고 있다. 이러한 과정은 질병의 진단과 치료에 필요한 의학적 추론능력과 술기뿐 아니라 의사의 전문직업성과 관련한 의사소통, 의료윤리 등을 학습하는 중요한 기회가 된다. 그러나 지거리스트(Henry Siegrist)에 따르면 과학적 의학이 막 태동하기 시작한 17세기에 임상의사들은 궁지에 몰린 느낌이었다(Siegrist, 1970).
견고한 기초 위에 확립되어 있던 것처럼 보였던 고전 시대 및 중세의학의 건물을 새로운 연구에 의해서 철저하게 무너져 내렸다. 하나의 학설뿐만 아니라 여러 가지 학설에 대해서 이야기할 수 있게 되었다. 임상가는 누구의 설을 따르면 좋단 말인가? 파라셀수스인가? 판 헬몬트인가? 의화학자인가, 의물리학자인가? 모든 것이 서로 모순되었고 많은 경우에 서로를 헐뜯었다. 해부학과 생리학은 의학지식에 중대한 공헌을 했다. 그러나 해부학과 생리학은 새로운 치료기술이 아니었다. 이들은 의료로 안내라는 길에 지나지 않았다. 몇 세기나 걸리는 길고 긴 길이었다. 의료는 기다릴 수가 없었다. 바로 도움이 되는 지도가 필요했다.
이 시기에 영국에서는 개원의 출신인 시드넘(Thomas Sydenham)이 어떻게 하면 질병을 치료하느냐에 집중을 했다. 그에게는 의학이론이 중요하지 않았다. 질병은 환자의 본성과 유해할 영향의 싸움에 의한 것이었고, 증상은 이 싸움이 표현된 것이었다. 질병을 이해하기 위해 최초의 증상 발현에서부터 최후의 증상이 소실되기까지 임상관찰이 중요했다. 시드넘은 의사의 시선을 새로운 방향, 즉 개개의 질병으로 향하게 했고, 의사를 실험실에서 나와 병실로 향하게 했다. 많은 연구자들이 사람과 질병을 일반적으로 연구하고, 부적당한 방법으로 병리학을 이해하고 있을 때 그는 병리학 각론이 중요하다고 주장했다. 각각의 질병에 대한 경험을 통해 가장 좋은 치료법을 배우고, 결론은 뒤에 가서 내리자고 했다. 이와 같은 질병에 대한 새로운 관점은 의사들이 질병의 본질을 이해하기 위해 침상 옆에서 관찰하고, 정확한 진단을 위해 노력하려는 태도를 가지게 했다(Siegrist, 1970).
18세기 초 네덜란드 레이덴 대학에는 제자인 할러(Albrecht von Haller)가 ‘당대 전 유럽의 스승의 표상’이라 한 부어하브(Hermann Boerhaave)가 의사 및 임상교사로 매력 넘치는 개성을 발휘하고 있었다. 침상 곁을 돌아다니며 환자들에게는 친밀한 말투로 안정감을 주었고, 제자들에게는 의사의 태도를 잘 보여주며 회진을 통한 교육을 실천하고 있었다. 그는 “타고난 진단자로 날카로운 통찰을 가지고 환자를 접했으며, 의약이나 올바른 조언뿐만 아니라 환자에게 친밀감을 주었고, 강의나 임상교시에서도 엄격한 논리를 청강자들과 공유했다”. 현대적인 환자 진찰법과 회진을 돌며 교육하는 방법이 이 곳에서 시작되었다. 침상 옆 교육의 효시가 된 것이다(Koehler et al., 2014; Siegrist, 1970).
시드넘과 부어하브에 의해 침상 옆 관찰과 교육이 발전하기 시작했다는 내용은 수많은 의학역사책에 소개되어 있지만 16세기 중반에도 이미 파두아 대학교에서 침상 옆 교육이 행해지고 있었다. 당시 학생들이 남겨 놓은 공책과 교수들이 남겨 놓은 인쇄물을 통해 손을 이용한 방법으로 진단과 치료기술을 발휘하기 위한 침상 곁 교육이 시작되었다고 한다. 바티스타(Giovanna Battista da Monte)와 프라칸자니(Antonio Fracanzani) 등이 병동을 돌며 학생들을 침상 곁에서 교육하는 방법을 도입하여 소변검사, 맥박을 느끼기, 배를 만져보기 등을 시행했다. 환자가 거주하는 집을 방문하는 경우에도 이와 같은 방법이 시도되었고, 이는 이론뿐 아니라 실제로 환자 치료에 활용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내는 일에 당시 의사들이 관심을 가지고 있었음을 보여 준다(Koehler et al., 2014; Siegrist, 1970).
그림 속에 나타난 의사들
의사가 등장하는 그림은 헤아릴 수 없이 많이 전해지고 있다. 전쟁과 같이 특수한 상황을 제외하면 19세기 이전에 그림 대부분에서 의사들은 특별히 하는 일 없이 환자 곁을 지키고 있는 모습으로 그려져 있다. 중세가 끝나고 근대에 접어들면서 1900년이 될 때까지 의학이 꽤 발전하기는 했지만 18세기 말부터 19세기에 걸쳐 제너(Edward Jenner)와 파스퇴르(Louis Pasteur)에 의해 예방백신으로 감염질환을 예방할 수 있음이 알려졌고, 코흐(Robert Koch)에 의해 세균이 감염병의 원인임을 증명하는 법이 알려졌을 뿐이었다. 1840년대에 마취제가 발견되고, 1860년대에 무균처리법의 도입으로 수술에 따른 예후가 획기적으로 발전했지만 치료약이 개발된 건 거의 없었다. 그랬으니 초기 치료를 마친 의사는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환자가 낫기를 기대하며 기다리는 것이 주된 일이었고, 이것은 그림에 잘 드러나 있다.
환자 곁에서 고뇌하는 의사의 모습이 가장 잘 드러나 있는 미술작품 ‘의사’는 1891년에 필데스(Luke Fildes)가 그린 것이다. 이 그림에 대해 무어(Jane Moore)는 “빅토리아 시대의 의사이면서 오늘날에도 좋은 의사로서의 표상을 보여 주는 작품”이라 했다(Moore, 2008).
사업가이자 자선활동으로 런던에 있는 두 군데의 유명 미술관, 즉 테이트모던 갤러리(Tate Modern Gallery)와 테이트 갤러리(Tate Britain Museum)에 이름을 남긴 테이트(Henry Tate)가 필데스에게 의뢰하여 제작된 그림 ‘의사(The Doctor)’에서 필데스는 함께 고민해주는 의사의 모습을 담았다. 필데스 자신을 닮은 의사는 어둠 속에서 등불의 빛을 받아 창백해 보이는 아기의 얼굴을 걱정스럽게 지켜보고 있다. 아기의 아버지는 아마도 기도를 하는 듯한 어머니의 어깨에 손을 얹고 있지만 어둠에 가려져 있어 얼른 눈에 띄지 않는다. 그림 왼쪽과 오른쪽에 있는 테이블 위에 약을 담은 그릇을 볼 수 있지만, 치료약이 거의 없던 시기였으니 의사와 부모 모두 아이의 증상을 완화해주는 약에 의지한 채 모든 것을 운명에 맡긴 듯한 모습이다. 바닥에 떨어져 있는 종이는 휴지인지 처방전인지 알 수 없지만, 필데스는 어둠 속에서도 선명한 빛을 통해 자신이 14년 전에 경험했던 죽음이 아닌 병든 아이의 회복을 기원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Yeh, 2015). 필데스는 이 작품에 대해 “오두막의 창에서 새벽이 스며들고 있다. 새벽은 죽음에 직면한 질병에 대한 아주 중요한 시간을 의미한다. 새벽이 되면 부모는 가슴에 희망을 품는다”라는 기록을 남겼다(Wilson, 1997). 비록 의사라 해도 환자에게 해 줄 수 있는 것이 별로 없던 19세기 말, 이미 질병으로 아들을 잃은 바 있는 필데스는 자신이 바라는 의사상을 그림으로 표현한 것이다.
1881년생으로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화가로 자라나던 피카소(Pablo Ruiz Picasso)가 16세경 그린 그림은 원 제목이 “병든 여성 방문(Visit to a sick woman)”이다. 누나의 죽음에서 영감을 얻어 그린 것으로 알려져 있는 이 그림에서 수녀가 환자에게 수프를 권하면서 자비를 베푸는 동안 의사는 맥을 짚고 있는 모습이 과학을 보여 준다(Digby, 1997). “과학과 자비(Science and charity)”라 알려져 있는 제목은 환자의 왼쪽에 앉아 맥박을 재고 있는 의사와 환자 오른쪽에서 아기를 안은 채 환자를 내려다보는 수녀를 각각 ‘과학’과 ‘자비’로 비유하여 표현한 것이다. 인간미를 물씬 풍기는 이 그림에서 의사의 모델은 피카소의 아버지이고, 작품 속 수녀의 모델은 피카소가 알고 있던 실제 수녀로 알려져 있다. 맥박을 짚고 있는 의사의 모습이 과학적으로 보이기는 하지만 이 시기는 진단을 하더라도 치료할 수 있는 질병이 거의 없었으므로 의사는 환자를 지켜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Yeh, 2015).
이상 19세기 말에 그려진 두 그림에서 의사는 환자를 옆에 두고 특별한 의료행위를 하고 있지 않다. 그러나 침상 곁에서 함께 고민하며 지켜봐 주는 태도만으로도 당시 사람들에게 신뢰감을 주기에 충분했고, 그것이 오늘날 명화속에 등장하는 대표적인 의사의 표상이 되었다. 그로부터 약 120년이 지나는 동안 의학은 비약적으로 발전하여 죽을 사람을 살려낼 수 있는 정도에까지 이르렀다. 그러나 병원에 가더라도 의사의 손길을 느끼기 어려워진 현대인들은 첨단의료기기와 약을 사용하는 의사보다 이와 같은 그림 속의 의사에게 더 친밀감을 느끼는 듯하다.
과학적 의학에 바탕을 둔 플렉스너 보고서
우리나라에 최초의 의학교가 문을 연 것은 1886년의 일이었다. 1884년의 갑신정변 후 민영익을 치료하면서 고종의 신임을 얻은 알렌은 고종의 허락을 얻어 1885년에 우리나라 최초로 서양의학을 시술하는 제중원을 열었고, 이듬해에 의사양성기관 허락을 받았다. 선교를 목적으로 조선에 온 의사들 소수가 진료를 맡았다가 의사양성의 임무를 부여받았지만 단순한 호기심의 대상이었을 뿐 이를 배우려는 사람들을 찾기가 어려워서 초기에는 의사양성기관으로서의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 1899년에 제중원의학교와 관립의학교가 문을 열면서 겨우 의학교육기관의 틀을 갖추기 시작했을 뿐이다.
그런데 의학교육기관의 의사양성 프로그램이 부실하기는 서양의 많은 나라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미국의 경우 1880년대부터 1910년에 이르기까지 의과대학이 종합대학의 일부가 되었고, 크기가 작은 사교육기관까지 합하면 의학교육기관의 수가 457개에 이를 정도로 늘어났으나 여기서 졸업하는 의사들의 질은 천차만별이었다. 1908년에 개최된 카네기 재단 이사회에서 의과대학과 법과대학에 대한 연구를 위해 재정지원을 하기로 결정된 후 1907년부터 3년간 미국과 캐나다 의과대학의 교육여건과 교육과정을 조사한 플렉스너는 1910년에 보고서를 제출했다. 이 보고서의 핵심주제는 과학을 기반으로 한 의학교육이었다. 그는 1893년에 4년제 의학교육기관으로 문을 연 존스홉킨스 의과대학을 가장 이상적인 모델로 받아들여 과학적인 기초가 마련된 학사학위 취득자를 입학대상으로 하고, 기초의학과 임상의학을 2년씩 교육하게 하는 교육과정을 제안했다.
플렉스너는 보고서에서 의학교육의 발전과정을 3가지 단계로 구분했다. 첫 시기는 히포크라테스와 갈레노스로 대변되는 고대 그리스와 로마 시기로 근원에 대한 관심을 잃어버린 도그마의 시기다. 두 번째는 16세기에 해부학이 소개되면서 시작된 경험의 시기로 질병의 원인을 알아내기보다 경험적으로 증상에 대한 처방이 주로 이루어진 시기다. 세 번째는 의학이 현대과학의 일부라는 인식이 이루어진 시기로 의학에 과학적 연구방법이 받아들여지면서 의학이 한층 발전된 시기다. 이 시기에는 사실에 근거하여 관찰가능한 현상은 물론 가능성, 예측, 이론을 함께 다루면서 독단적이지 않고, 다른 분야에 개방적인 태도를 요구한다. 학생들은 실험실습과 임상교육과정에서 능동적으로 참여해야 하며, 이에 따라 경험적 의학에서 과학적 의학으로 전환되었다. 그 결과 기초과학의 지식이 의학에 이용되면서 의학이 크게 진보되었다(Flexner, 2015).
플렉스너 보고서가 제출된 후 의학을 공부하는 학생들이 저학년에서 해부학, 생리학, 생화학, 약리학, 미생물학 등을 공부하는 교육과정이 마련되었다. 이와 같은 교육과정은 플렉스너가 기초의학의 중요성을 인식했기에 만들어진 것이었다. 역사적으로 미국의학은 기초의학보다 임상의학 중심으로 발전해 왔지만 19세기 말에 독일로 유학을 떠난 사람들이 기초의학의 발전을 경험하면서 기초의학이 발전하면 임상의학 발전에도 큰 도움이 된다는 사실을 익히 깨닫고 있었다. 플렉스너도 기초의학이 임상의학의 기초라 생각했다. 19세기 말 파스퇴르나 코흐 같은 기초의학자들의 활약에 의해 의학이 한층 발전했으며, 임상에서의 경험을 바탕으로 한 명의 환자를 치료하는 것은 의학발전에 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과학에 바탕을 둔 의학교육과정이 제안되자 전 세계의 많은 국가들이 이와 유사한 교육과정을 마련하여 의사를 양성하게 되었다. 바야흐로 과학적 의학이 의학에서 중요한 위치를 점하게 된 것이다.
20세기 말에 찾아온 의학 패러다임의 변화
20세기 초중반까지 의학의 대세는 감염병이었다. 1901년 최초의 노벨 생리의학상을 받은 베링(Emil von Behring)의 업적은 ‘혈청을 이용한 디프테리아 예방법 개발’이었다. 제너와 파스퇴르에 의해 백신을 이용하여 감염병을 예방하는 방법이 알려졌으니 어떤 감염병이든 백신을 만들어 예방하려는 노력이 이어지면서 새로운 백신이 계속 제조되었다.
예방백신을 접종받지 않은 상태에서 일단 병이 발생하면 치료할 약이 최초로 개발된 것은 1909년 에를리히(Paul Ehrlich)에 의해서였다. 19세기 말 세균학이 발건하면서 염색법에 관심을 가진 그는 “화학적으로 특이성을 가진 치료제를 사용하여 질병을 치료할 수 있을 것이라는 독창적인 이론을 창안하였고, 이를 ‘마법의 탄환’이라 했다(Golub, 1994).” 그는 기본적인 비소화합물의 구조를 변형시키기 위한 연구를 진행하여 606번 화합물을 합성하였다. 이것이 오늘날 살발산 606호로 알려져 있으며, 매독 치료에 아주 효과적이었다. 그가 주장한 ‘마법의 탄환’이 최초로 합성에 의한 화학요법제로 등장한 것이다.
뒤를 이어 1928년에는 플레밍(Alexander Fleming)이 최초의 항생제인 페니실린을 발견했다. 기대보다 못한 항균효과에 실망한 그는 더는 실용화를 위한 노력을 기울이지 않았으나 이 연구에 관심을 가진 플로리(Howard Florey)와 카인(Ernst Chain)에 의해 페니실린이 실용화함으로써 이들은 공동으로 1945년에 노벨 생리의학상을 수상했다(Wilson, 1976). 1932년에는 독일의 도마크(Gerhard Domagk)가 프로토질이 포함된 설파제를 합성함으로써 새로운 화학요법제를 개발하는데 성공했고, 이것은 1939년의 노벨 생리의학상을 안겨다 주었다(Domagk, 2016). 또 1944년에는 미국의 왁스만(Selman Waksman)이 두 번째 항생제라 할 수 있는 스트렙토마이신을 발견함으로써 결핵 치료의 길을 터 주었다. 그는 이 공로로 1952년 노벨 생리의학상을 수상했다(Waksman, 2016).
계속되는 백신과 약의 개발과 함께 제2차 세계대전 후 지구상에 평화가 찾아오자 농업생산성이 크게 증가하기 시작했다. 인류는 역사상 유례없이 충분히 먹을 것을 구할 수 있게 되었고, 열량이 높은 패스트푸드가 보급되면서 영양공급이 전보다 훨씬 좋아졌다. 그러자 인체의 면역력이 현저히 증가되었고, 위생에 대한 관념이 증가하면서 감염병이 전파되기 어려운 환경이 조성되었다. 이상의 조건이 갖추어지면서 20세기 중반 이후 감염병은 전보다 현저히 줄어들었고, 사람들의 수명은 점점 늘어나기 시작했다. 그 결과 ‘감염성 질환으로 인한 공포와 희생이 줄어들자 사람들은 오래 전부터 존재해 왔던 다른 질병들을 더 중요하게 인식하기 시작했다. 당뇨, 암, 갑상선종, 크레틴병, 왜소중, 류머티즘 등은 모두 태고 때부터 알려져 있던 병이지만 각종 열병과 전염병의 통렬한 비극에 가려 뒷전에 머물러 왔다. 급성감염성 질환이 무대의 중심에서 물러나자 사람들은 비감염성이며, 눈에 잘 띄지 않는 만성 질환들을 비로소 인식하기 시작했다(Golub, 1994).’
이렇게 만성 중심으로 질병의 패러다임이 바뀌기 시작할 때 인슐린이 또다른 마법의 탄환 역할을 했다. 또 1980년대부터 유전학이 크게 발전하면서 질병의 원인을 유전자에서 찾으려는 노력이 시도되었고, 현재는 인간 유전체가 완전히 해독된 상태다. 그러나 만성 질환의 원인이 되는 유전자는 특정 유전병에서 특정 유전자에 변이가 발견된 것과 다르게 각 병마다 다양하게 나타나고 있으므로 한 가지 유전자보다는 여러 유전자가 복합적으로 관여하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감염병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마법의 탄환’을 찾는 것이 좋은 방법이 되었지만 오늘날 대세가 된 만성 질환을 해결하기 위한 ‘마법의 탄환’을 찾는 데 한계가 있는 것이 현대의학의 특징이다.
급성 감염질환이 대세를 이루던 때에는 특정 병을 치료할 수 있는 특정 약을 찾는 전술이 주효했지만 만성 질환이 대세를 이룬 오늘날에는 의학의 패러다임이 바뀌었으니 질병을 대하는 태도도 바뀌어야 한다. 만성 질환에 대한 치료(treatment)보다 돌봄(care)이 중시되는 현대의학에서는 과학적 사고에 바탕을 둔 의학만으로는 부족하며, 의사가 환자와 돈독한 관계를 이루고 합심하여 건강상의 문제를 해결해 가야 할 것이다. 이를 위해 침상 옆에서 느낄 수 있는 의사의 손길이 더 중요해질 것이며, 이는 앞으로 인공지능이 의사의 역할 일부를 대신하는 경우에도 아주 유효한 방법이 될 것이다.
침상 옆 교육의 시대가 다시 온다
의학을 공부하는 이들이 환자의 진료에 직접 참여하는 학습활동이 중요함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존스홉킨스 의과대학의 설립자 중 한 명인 오슬러(Willium Osler)는 “의학은 교실이 아니라 침상 옆에서 학습된다”라는 말을 남겼다(Stone, 1995). 18세기 초 부어하브가 환자의 침상 곁에서 의사를 꿈꾸는 예비의사를 대상으로 의학교육을 한 것이 당시 의사들의 사고방식을 바꿀 만큼 훌륭한 효과를 발휘했지만 미국(Williams et al., 2008)이나 한국(Yang et al., 2007)에서 20세기 후반에 의학이 크게 발전하면서 침상 옆 교육과 환자를 돌보는 방식은 쇠퇴해 왔다.
침상 옆 교육의 학습기회가 감소한 이유는 의료환경 또는 학습환경의 측면에서 다양하게 확인할 수 있다(K Ahmed, 2002; Thibault, 1997). 우리나라의 한 연구에 따르면 침상 옆 교육이 쇠퇴한 이유를 의사이자 교수자인 교육담당자가 침상 옆 교육에 대한 인식이 부족하고, 교수전략이 부재한 것이 원인이라 지적했다(Jung & Kim, 2011). 이들의 발표에 따르면 병원에서 의사 역할을 수행하는 많은 의사들이 자신의 가르치는 역할에 대하여 심리적으로 불편함을 가지고 있고, 교육병원에 소속된 의사들도 진료활동에 교육이 동반된다는 의식이 부족한 상태다. 환자의 인권의식 상승에 의해 진료중 학생교육을 하는 것을 탐탁치 않게 생각하는 분위기도 침상 옆 교육이 원활하지 않은 이유가 되고 있고, 임상에 종사하는 의사들이 교수방법에 익숙지 않은 것도 침상 옆 교육이 부족한 이유라 한다. 그러나 이런 단점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침상 옆 교육은 의사와 학생은 물론 환자들에게도 도움이 되는 방법이다(Ramirez et al., 2016).
부어하브는 단순히 침상 옆을 돌면서 환자와 대화하고, 진료하는 모습을 학생들에게 보여 주는 것만으로도 좋은 효과를 주었지만 환자의 권리가 중시되는 오늘날에는 침상 옆에서 교육을 하려면 어떻게 하는 것이 효과적인가에 대해서도 고려할 필요가 있다. Kim & Lim (2014)은 침상 옆 교육에 활용 가능한 교수모형 및 교수전략을 확인하고, 각각의 특징과 한계를 분석한 논문에서는 효과적인 교육을 위한 다섯 가지 교수학습 환경설계의 기본원리를 제안한 바 있다. Chapman et al. (2014)도 전통적인 침상 옆 교육을 더 구체화하고, 규격화한 방법으로 그 효과를 향상시킨 논문을 발표하는 등 침상 옆에서 어떻게 교육을 하는 것이 좋은가에 대하여 외국에서는 수많은 논문이 발표되고 있다. Peters & Ten Cate (2014)는 그동안 발표된 침상 옆 교육에 대한 논문을 분석하여 침상 옆 교육이 쇠퇴해 가고 있지만 임상능력을 함양하고, 교수와 학생이 만족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이라 주장했다. Carlos et al. (2016)은 침상 옆 교육 시 즉시 피드백이 주어질 수 있으면 어떤 교육방법보다 효과적이라 했으며, Khan (2014)은 기관의 정책, 잘 계획된 교육방법 적용, 학생들에 대한 교수진들의 칭찬과 격려가 동반될 수 있게 침상 옆 교육을 위한 교육과정을 개발하면 가장 좋은 교수법이 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와 같은 논문 외에도 여러 의학교육 학술지에 끊임없이 침상 옆 교육의 중요성에 대한 제안이 들어오고 있다(Dewji et al., 2014; Lichstein, 2015; Stolberg, 2014).
본고 서두에서 인용한 TED 강연의 주인공 베르기즈는 ‘스탠포드 의학 25 (Stanford Medicine 25, 2016)’라 이름 붙은, 스탠포드대학교 의학전문대학원에서 3–4학년 학생들을 대상으로 임상에서 벌어지는 의학(bedside medicine)의 문화를 강조하고, 향상시키기 위한 교육 프로그램의 책임자로 일하고 있다. 스탠포드대학교 홈페이지에 소개된 Stanford Medicine 25에 대한 내용을 요약하면 아래와 같다(Stanford Medicine, 2016).
Stanford Medicine 25는 침상 옆 의학교육의 문화를 증진시키기 위한 것으로 다지선다형 시험과 대조적으로 침상 옆에서 최종 시험을 치르게 함으로써 침상 옆에서 진료능력을 키울 수 있는 자극제 역할을 할 수 있도록 고안된 프로그램이다. 장차 의료계에서 일하게 될 의사들이 의료 공급자로 일하게 되면 불필요한 검사나 비싼 영상술 사용이 늘어날 가능성이 크지만 이 프로그램은 환자를 대하는 첫 단계가 침상 옆에서 관찰하고, 검사하고, 관계형성을 잘 하는 것이라 생각하여 고안되었다. 학생과 전공의들이 침상 옆에서 이학적 진단을 하는 과정을 관찰하면 이론을 숙지하고 있는 경우에도 실제로 행하는 것에는 문제가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이들이 환자를 대하는 기술을 향상시키는 데에는 침상 옆 교육이 중요하며, 침상 옆에서의 진찰과정을 통해 많은 병을 진단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신경과 질환의 경우 아무리 영상을 이용한다 하더라도 운동과 감각신경손실을 확인하는 것은 침상 옆에서의 진단으로만 가능하다.
근거중심의학(evidence-based medicine) 신봉자라면 침상 옆에서의 교육을 ‘아무것도 증명할 수 없는 방법’이라 할 수도 있겠지만 Stanford Medicine 25는 증명을 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반사는 정상’ 또는 ‘뇌신경 정상’이라고 기록하는 경우 이를 확인하는 방법으로써 정확한 관찰을 위한 것이다.
Stanford Medicine 25에서 25는 검사방법이 25가지임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며, 이 방법을 교육받는 학생과 전공의들은 어디서 어떤 환자를 대하게 되거나 침상 옆 진찰의 중요성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다. 장차 Stanford 50이나 Stanford 200으로 늘어날 수 있도록 계속 업데이트해 갈 것이므로 이 홈페이지에서 장차 더 많은 것들을 만날 수 있을 것이다.
실제로 온라인상에서 이학적 검사에 대한 자료를 쉽게 발견할 수 있으며, 아주 유용한 것은 이 홈페이지에 링크시켜 놓았다. 우리가 개발하지 않은 외부 자료에 대해 감사하며, 이 글을 읽는 분들이 아주 유용한 온라인 자료를 발견하면 우리에게 알려주시면 감사하겠다.
결 론
2016년 이세돌과 알파고의 바둑대결은 IBM의 왓슨에 이어 구글의 알파닥터가 실용화될 경우 미래의 의료사회가 어떻게 변화할 것인가에 대한 의문을 제기했다. 인공지능이 미래에 사람들의 예상을 뛰어넘는 훌륭한 능력을 발휘할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고, 또 그래봐야 사람의 통제 하에서 시키는 일만 할 것이라는 예상도 있다. 역사적으로 인류 문명의 발전 속도가 예상을 뛰어넘어 가속화한 경우가 많고, 인공지능시대에 어느 예상이 옳을지는 미래가 되어서야 판명되겠지만 분명한 것은 인공지능의 발전과 함께 의료형태가 바뀔 것이라는 점이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컴퓨터 수준을 훨씬 뛰어넘는 인공지능이 일반적으로 이용되는 사회가 되면 환자가 컴퓨터에 자신의 증상을 입력하고, 그 컴퓨터가 알려주는 과정을 따라가다 보면 진단명이 붙거나 최소한 몇 개의 가능성을 제시해 주는 걸 보고 의사가 진단을 결정하는 일이 벌어질 수 있을 것이다. 이와 같은 방식으로 의사의 역할이 축소되는 상황이 벌어진다면 의사는 환자 곁에서 함께 고민하는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가는 것이 미래에 중요한 역할의 하나가 될 것이다. 20세기 후반에 과학에 바탕을 둔 의료기기의 발전에 의해 환자로부터 의사의 거리가 멀어진 것을 다시 다가가는 기회로 삼자는 것이다.
사람과 인공지능의 바둑대결이 있기 5년 전에 이미 베르기즈는 미래 의료의 가장 큰 혁신을 의사가 가진 손이 큰 힘을 발휘할 것이라는 예견을 했다. 인공지능이 의료계에 현실로 다가오기 전부터 침상 옆 교육과 그 효용성에 대한 많은 연구논문이 발표되었고, 환자를 대하는 의사의 손길이 미래의 의료에서 지금보다 더 큰 역할을 하게 될 것으로 기대된다. 앞으로 의학교육에서는 이 역할에 초점을 맞추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