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가운 의학, 따뜻한 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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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ean Med Educ Rev. 2011;13(2):69-72
Publication date (electronic) : 2011 December 30
Department of Medical Education, Yonsei University College of Medicine
부성희
연세대학교 의과대학 의학교육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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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FERENCES

The Human Side of Medicine (2002)

저 서:차가운 의학, 따뜻한 의사

저 자:로렌스 A. 사벳

역 자:박재영

원 제:The Human Side of Medicine

출판사:청년의사

출판일:2008년 2월 25일

쪽 수:414쪽

이 세상에는 다양한 분야의 많은 전문가들이 있다. 그러나 모든 전문가가 다 평생동안,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의 본질이 무엇이며, 그 본질에 가까이 가기 위해 무엇이 필요한지에 대한 질문을 계속하는 것은 아니다. 여기에 더하여 답을 찾기 위한 치열한 전문가적 삶의 여정 속에서 얻게 된 크고 작은 성취와 통찰들을 다음 세대와 동료들을 위해 꼼꼼히 기록하고 나누는 일이, 전문가로서 자신의 아이덴티티의 매우 중요한 한 부분임을 깊이 이해하고 있기란 더욱 드문 일이다.

간혹 그러한 전문가나 그의 저작을 접하게 되면 우리는 그를 그저 한 사람의 프로페셔날이 아닌 자신의 전문분야의 고유한 가치와 아름다움을 드러내고 실현시키기에 충분한 ‘대가(大家) 혹은 고수(高手), 그리고 그의 역작(곋作)을 만났다’ 고 기꺼이 말할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로렌스 A. 사벳은 가히 의학 분야에서 대가의 반열에 오를 만하며 그의 책『차가운 의학, 따뜻한 의사』는, 원 제목인 ‘The Human Side of Medicine’ 이 말해주듯이, 의학이라는 학문이 얼마나 흥미진진하고 흥분된, 살아있는 인격들 간의 만남과 관계맺음을 ‘치료’ 의 핵심으로 포함하고 있는지, 의사란 얼마나 의미 있게 “다른 사람의 삶의 일부가 될 수 있는 직업” (387p)인지를 참으로 대가다운 깊이와 방식으로 보여주고 있다.

사벳의 ‘대가다운 깊이’ 는 특히, “냉정하지만 뛰어난 실력을 가진 의사와 따뜻하지만 실력은 그저그런 의사” 라는 그간의 억지스러운 이분법을 무색케 하고 ‘좋은 의사란 의학의 과학적 측면과 인간적 측면을 균형 있게 잘 통합시키는 사람’ 이라는 진실을 생생히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드러난다. 또한 이 책의 또다른 대작의 풍모는 사벳이 이 주제를 다루어가는 ‘방식’ 에 있다. 그는 30년 이상의 환자 진료와 학생 교육의 다양하고 구제적인 임상 사례들과 그에 대한 반성(reflection), 성찰의 기록들을 의학의 인간적 측면을 시각화(envision)하기 위한 풍부하고 다양한 원천으로 활용하고 있다. 이 책에 제시된 수많은 사례들과 이야기, 경험에 대한 보고는 의학의 인간적 측면이라는 아이디어를 더욱 구체적이고 공유 가능한 것으로 만들어주는 효과적 도 구임에 틀림없다.

400쪽에 이르는 적지 않은 분량에 담긴 심오한 내용들을 간략히 요약하기란 쉽지 않다. 이 책을 읽다보면, 좋은 의사로서의 닥터 사벳의 다양한 특징들이 매우 인상깊게 부각된다. 첫째는 전문가로서의 사벳의 면모이며, 둘째는 의과대학에서 가르치는 교육자의 모습, 그리고 세 번째는 환자, 학생, 동료들을 통해 끊임 없이 배움을 추구해 가는 평생학습자로서의 모습이다. 이 각각의 면모(이는 곧 좋은 의사의 요건이자 의학의 인간적 측면에 대한 이해와 관련된 것이므로)와 책의 각 장들을 연결 짓는 방식으로 책의 내용을 요약, 소개하고자 한다.

첫째, 이 글의 서두에 언급한 바처럼, 사벳은 철저히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의 본질을 명확히 파악한 토대위에서 그 일을 어떻게 하면 가장 잘 할 수 있는가에 대해 알고 있는 전문가의 모습을 보여준다. 그에게는 의료란 단순히 ‘질병’ 과 ‘인체’ 에 국한되지 않는, 의사와 환자와의 관계 속에서 이루어지는 일련의 과정과 결과이다. 이 책의 첫 장의 제목은 ‘환자가 된다는 것’ (‘의사가 된다는 것’ 이 아니라)이며, 가장 첫 줄은 “환자가 된다는 것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지 않고서는 결코 좋은 의사가 될 수 없다” (45p)는 의미심장한 문장으로 시작한다. 좋은 의사가 된다는 것, 그리고 의학의 인간적 측면에 대한 이해는 최우선적으로 환자와의 의사소통, 환자와의 좋은 관계맺음에 달렸다는 것, 환자의 이야기 속에는 그의 인생관과 삶의 역사가 담겨있다는 것, 환자의 가치관을 파악하는 일이 의사에게 얼마나 중요한지를 아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는 점이다. 이는 단지 환자와의 좋은 관계가 치료에 도움이 된다는 소극적 주장을 넘어서서 그러한 인간 이해가 빠진 의료는 진정한 의미에서 전문적인, 그리고 본질적인 것이 되지 못한다는 보다 적극적인 주장을 담고 있다.

이런 점에서 사벳이 말하는 의학의 인간적 측면은 단순히 “‘환자에게 친절한 것’ 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의료의 여러 차원들의 조화, 신중하고 꼼꼼하고 재현 가능한 과정들의 연속” (29p)을 뜻한다. 그것은 또한 환자와의 좋은 관계를 맺는 일에서 좋은 치료로 나아가는 전문적 지식과 기술을 함께 성공적으로 엮어 넣을 수 있는 의학의 본질적 특징을 밝혀준다. 따라서 이러한 자질들은 체계적이고 계획된 때로는 혹독한 전문적 훈련의 결과이지 단지 ‘성격 좋아서’ 나 ‘사명감이 투철해서’ 될 문제는 아닌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사벳은 한편으로는 환자들의 이야기의 중요성(1장), (의사-환자 관계가 구축될) 시간의 중요성 (3장), 환자의 경험으로부터 배우기(4장), 불확실성에 함께 대처해 나가기(6장), 환자가 질병에 대처하는 방식 이해하기(7장), (환자의)가치관 이해하고 변화에 대처하기(17장), 언어와 의사 소통(14장) 등에 대한 경험과 비법들을 제시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기본에 충실해야 하는 의사의 반복적 일상(8장, 22장), 의사의 더 나은 추론 방식과 진단(10장), 협력을 핵심으로 하는 의학 (12장), 병원의 수 많은 의식(구조와 형식)에 숙달되어야 할 필요 (13장), 오류발생가능성을 특징으로 하는 의학(15장), 전문가로 계속 발달해가기(18장)를 포함하는 ‘의사로서의 철저한 임상적 역량과 자질들’ 을 함께 제시한다.

둘째, 사벳은 이 책에서 더 좋은 의사가 되기 위한 필연적인 과정으로서 의사가 좋은 교육자가 되어야 할 필요성에 대해 주목하게 한다. 그의 책 전체에서 각 주제를 다룬 후 반드시 <~가르치기>로 마무리하고 있는 것에서도 드러나지만, 특히 4부에서 인문학으로서의 의학: 통합적으로 보기(22장), 그리고 5부에서 인문학으로서의 의학 가르치기(23장)에서 집중적으로 교육적 통찰들을 제시하고 있다.

사실, 적지 않은 사람들이 의사로서의 따뜻함, 환자(인간)이해 능력, 공감, 연민, 감수성과 같은 주제들이 좋은 의사의 중요한 특징인 것은 인정하겠는데, 그것이 ‘가르쳐서, 혹은 과목 몇 개 듣는다고 될 일인가’ 라는 의구심을 표현해 왔다. 이는 이미 오래 전 고대 희랍에서 소크라테스에 의해 제기된 질문, ‘덕은 가르쳐 질 수 있는가’ 라는 철학적 질문의 현대적(의학교육적) 표현이라고도 볼 수 있는데, 적어도 이 질문에 대한 사벳의 답은 아래와 같이 매우 단호하고 분명하다.

의학의 인간적 측면에 대한 다양한 구성요소들은 분석 이 가능한 것들이며, 분석이 가능하기에 교육도 가능해 지는 것이다. 나는 이 책을 쓰는 동안 계속해서 분석했 고 또 공부했다. 내가 의학의 인간적 측면을 누군가에게 가르치는 일이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내가 그것을 다른 사람들-의사, 간호사, 심리학자, 사회사업가, 성직 자들과 수없이 많은 환자들(그들이 진짜 전문가다)-에 게 ‘배웠기’ 때문이다. 의사로서 우리는 우리가 하고 있는 일들을 매력적이고 흥미롭고도 전달가능한 방법으로 환자들과 동료들과 미래의 의사들과 교육자들에게 가르쳐야 하는 의무를 갖고 있다. (27p)

따라서 이 책은, 환자와의 사려 깊은 대화, 질병과 관련된 정신사회적 주제들의 탐구, 좋은 인간 관계 만들기, 가치관에 대한 고려 등 환자를 잘 돌보는 일에 도움이 되는 모든 기술들의 총합에 대한 진정성 있는 유용한 ‘공식’ (28p)들을 담고 있으며 이것은 사벳의 교육자적 열정이나 실천과 깊이 연결되어 있다. 교육과 진료라는 정말 양립하기 어렵고 때로는 부담스럽기까지 한 두 종류의 과업이 사벳에게서는, 더 잘 진료하는 일이 곧 더 잘 교육하는 일로 연결될 수 있는(물론 그 역도 가능해지는)방식으로 화해되고 있다.

셋째, 사벳의 책에서 나타난 또다른 모습은 불굴의 노력과 강한 의지로 점철된 그의 ‘학습자’ 로서의 면모이다. 환자의 경험 으로부터 배우기(4장), 학생의 경험으로부터 배우기(5장), 그리고 의사-환자 관계를 다룬 장들(19-22장)에서 집중적으로 ‘배움’ 이 주는 유익과 통찰에 대해 쓰고 있지만 사실상 그의 책의 모든 장은 매 주제마다 임상 사례를 제시한 이후에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반드시 포함하고 있다. ‘내가 (이 사례로부터, 이 학생으로부터, 그리고 이 환자로부터) 배운 것은 무엇인가?’ 이 책에 담겨있는 주옥같은 성찰과 반짝이는 실천적 지혜는 그의 전 생애에 걸쳐 끊임없이 제기되었던 다음과 같은 질문들의 결과가 아니었을까 생각해 본다.

  • - 질병이 환자의 자아상에 미치는 영향은 무엇인가?

  • - 치료의 매 단계에서 치료 효과를 높이기 위해 환자와의 관계를 어느 정도로 활용할 수 있을까?

  • - 환자에 대해, 질병에 대해, 질병에 대한 환자의 대처 방식에 대해, 환자나 다른 경로를 통해 여러 정보들을 얻어내는 과정에 대해, 잘못될 수 있는 가능성들에 대해 나는 무엇을 배웠나?

  • - 이 사례를 통해 나는 나 자신에 대해서는 무엇을 알게 되었나?

사실 ‘경험’ 그 자체는 전문가들 간의 차별화된 전문성을 보장해 주지 못한다. 우리는 그간, 경험은 많지만 덜 전문적인 임상의와 경험은 일천하지만 뛰어난 젊은 임상의를 주위에서 쉽게 보아오지 않았는가? 사벳의 경우처럼 경험이 더 좋은 의사로의 학습에 기여하는 것은 경험 그 자체가 아닌 경험으로부터 ‘배우려는’, ‘반성하려는’, 그리고 ‘나누려는’ 그의 비범한 노력들에 연원하는 것이다.

사벳의 책『차가운 의학, 따뜻한 의사』에는 닥터 사벳이 얼마나 좋은 (평생)학습자이며 또 좋은 교육자인지, 그리고 얼마나 좋은 의사인지를 증명해 주기에 충분한, 무수히 많은 무게실린 질문목록들, 그리고 그 질문에 대한 의미있는 반성과 통찰로 가득 차 있다. 또한 의학의 인간적 가치는 좋은 임상의가 되는 일과 결코 분리될 수 없으며 오히려 이러한 다양한 인간적 가치와 자원들을 임상적 과정과 성과에 녹여낼 수 있는 역량이 의사 전문성의 핵심요건으로 이해되어야 한다는 점이 이 책 전체에 녹아 있는 핵심 아이디어이다.

사족이지만, 이러한 점에서『차가운 의학, 따뜻한 의사』이라는 책의 제목은 자칫 의학과 의사와의(사실은 ‘실력’ 과 ‘사람’ 간의) 이분법적 구분을 상기시킬 수도 있고 사벳이 이 책 전체에 서 함의하고 있던 ‘임상과 인문사회의학의 통합으로서의 의학의 인간적 측면에 대한 이해’ 라는 기조와는 오히려 살짝 어긋나 있는 느낌마저 든다. 그러나 어떠하랴. 제목이 충분히 매력적이고, 무엇보다 이분법에 이미 익숙해진 우리의 마음에 먼저 확 와 닿고, 그래서 의과대학 학생들과 교수들, 의료인들, 그리고 환자 들의 눈길을 끌고 그들이 이 책을 더 많이 읽게 된다면 그보다 좋은 일은 없지 않을까. 첫 장을 펴는 순간 제목이 주는 꼬드김과는 비교가 안될 더 강력한 닥터 사벳의 꼬드김이 모든 것을 다 해결 할 것이다. 더구나 행간을 놓치지 않으면서도 정갈하고 깔끔하게 번역된 좋은 문장들은 이 책의 매력과 의학에의 초대에 대한 기분 좋은 응답을 돕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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