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의학과 환상통 - 이응준의『약혼』을 중심으로

Modern Medicine and Phantom Pain

Article information

Korean Med Educ Rev. 2011;13(1):25-34
Publication date (electronic) : 2011 June 30
doi : https://doi.org/10.17496/KMER.2011.13.1.025
Medical Education Unit., Yonsei University Wonju College of Medicine
반재유
연세대 원주의과대학 의학교육실
• 교신저자:반재유, 강원도 원주시 일산동 연세대 원주의과대학 의학관 306호(의학교육실) • Tel : 033-741-0245 • E-mail : juban@yonsei.ac.kr
Received 2011 May 15; Revised 2011 June 21; Accepted 2011 June 22.

Trans Abstract

Modern medicine has early experienced the absence of mimesis and has been trying to replace the absence with objective grounds and experimental data. However, as medicine became science, the crisis of medicine spread more widely. Microscopic powers and violences are invisible, but individuals are powerless and vainly unable to resist. The anguish or introspection about the situation is sometimes described in stories such as An Engagement by Lee Eung Jun. An Engagement is mentioned in this article due to the writer's attitude, which shows his introspection and desire for harmony through the wounds of each trivial character. The writer is unceasingly talking about suffering people in his story and his seriousness enables readers to find his stronger sympathy over life and death than in any other medical stories. In fact, it is impossible for readers to comprehend the confusing propositions which the writer pours out, and even uncomfortable to read the story. Nevertheless, the propositions are always in contact with reality. Perhaps it is not the writer's confusing propositions that make us uncomfortable. It might be ourselves who are always alienated and starved. We can say that the characters' pains and wounds are phantom pains caused by the absence of mimesis. Since there is no affected area, their pains cannot be measured by only scientific medicine. However, the current medical profession regards objective research evidences as absolute truth and allows them to be the sole criterion. Although scientific skills such as DNA analysis and MRI scan can be the substitutes for doctors' judgment, so much of medicine is still interpersonal relationships. An Engagement. As a person promises to marry another, as all beings together in the world promise to subordinate to one another, every subject is consistently a valuable part of each other for the writer's eyes. He is aware that it is originally impossible to get engaged to the world, but he does not give up the possibility of genuine communication. In today's post-modernism society, where a large number of pathological views define the members and the world itself, endless questioning of existence and digging into pathology will be the only way to reduce the gap between individuals and their world. This article does not say that a literary work will lead the change of medical paradigm. It sprang from a desire for medical humanities to gain more interest of the medical field, where the encounter between literature and medicine is still unfamiliar, and to make medical education recognize the importance of humanities. Starting with this work, I believe that the humanities will help us to find the solution to the age of absence of mimesis and to the crisis of medicine.

서 론

독일의 철학자 아도르노(1903~1969, Theodor Wiesengrund Adorno)는 주체와 대상간의 비억압적이고 비지배적, 화합적 소통방식인 미메시스(mimesis)가 이미 주술시대 이후 상실되기 시작했으며 그로인해 인류는 화합과 소통의 부재를 경험하게 되었다고 하였다(Horkheimer & Adorno, 1995). 실상 주체와 객체의 관계 내지 화합의 문제는 인류의 끊임없는 철학적 명제였다. 더구나 모더니티의 죽음인, 탈근대성이 거론되는 현 시점에서는 그 문제의 심각성이 더해진다.

일찍이 현대의학도 미메시스의 부재를 경험하면서 그에 대한 고민을 객관적 근거와 실험적 데이터로 대신하려 했다. 그러나 의학의 과학화가 거듭될수록 의학의 위기는 점점 더 확산될 뿐 이었다. 보이지 않는 미세권력과 폭력, 허무하도록 저항의 힘조차 없는 주체, 이러한 현실에서의 고뇌와 성찰은 종종 작가의 펜 촉을 따라 문학 속에 서술되기도 한다. 이응준의『약혼』(2006)이 그러하다.

『약혼』을 읽어본 독자라면, ‘이 소설이 의학소설인가?’ 라는 물음을 던질 수 있다. 사실 이 작품에는 의사라는 직업이 비중 있게 다뤄지지도 않으며, 그렇다고 의료환경이 작품의 주요 배경을 이루는 것도 아니다. 그나마 작품에 등장하는 유일한 의사는 단 한마디 대사도 없다. 단지, 작품의 주요인물 중 하나인 해원의 대사를 통해 그의 언행과 성격을 짐작할 수 있을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고에서『약혼』을 거론한 것은, 소소한 인물들 하나하나의 상처를 통해, 화합에 대한 성찰과 열망을 드러내고 있 는 작가의 태도 때문이다. 끊임없이 사람의 고통에 대해 이야기 하고 있는 작가의 진지함 속에서 어느 의학소설보다 강한 삶과 죽음에 대한 연민이 숨어있다.

『약혼』은 제목부터 논란의 여지가 많다. 서경석은 이를 ‘지상의 고통, 다이아몬드로서의 죽음’ 으로 파악했으며 ‘예측할 수 없는 폭력적 세상 앞에서 사람답게 대응하는 방식이 최소한 말 없이 사는 것, 더 나아가 죽음으로 응전하는 것’ (서경석, 2006)으로 본 작품을 해석했다. 실상 작자가 토해내고 있는 당황스러운 명제들을 하나하나 주워 담기는 애당초 불가능하며, 심지어 불편하기까지 하다. 그러나 그 명제들은 한결같이 현실과 맞닥뜨려져 있다. 이 작품이 불편한 것은 어쩌면 작가의 당황스러운 명제가 아닌, 소외되고 끊임없이 갈증하는 우리(자아)의 모습 때문일지도 모른다. 본고에서는 이를 ‘色盲(Ⅱ장)’ 과 ‘恐水病(Ⅲ 장)’, 그리고 ‘幻想痛(Ⅵ장)’ 으로 상징했다. 온혈동물만이 가질 수 있다는 苦痛, 그리고 傷處를 통해 작가가 그리고자 했던 ‘約 婚’의 의미를 되새겨 보도록 하자.

소외된 주체, 色盲

『약혼』에는 세 명의 중심인물이 등장한다. 색맹(色盲, color blindness)인 은조와 공수병(恐水病, hydrophobia)의 트라우마 (trauma)를 가진 병우, 육손이(多指症, polydactylism) 해원. 현재를 살아가는 그들은 상처 많은 인물들이다. 작품은 내내 은조의 독백으로 진행된다.

‘저 여자와 저 남자는 아까부터 단 둘이 마주 보고 술을 마시면서도 아무런 대화가 없다. 그래서 그들은 서로의 연인이다.’ (이응준, 2006)

대화가 없는 연인의 모습을 보며, 은조는 세상과 동화될 수 없었던 자신과 병우 그리고 해원의 모습을 떠올린다. 우울한 기운 이 시종일관 그의 목소리를 통해 전달되는 것은 아물지 않는 상처에 대한 기억과 고통 때문이다.

은조는 ‘인생은 감히 어느 누구도 장담할 수가 없다.’(이응준, 2006)라는 작가의 명제처럼, 어느 날 형님의 두 아들이 할아버지 농장 앞 저수지에 빠져 죽는 사건을 경험한다. 그의 형님은 아들을 둘이나 둔 뿌듯함을 술기운에 빌려 ‘자식이 둘이니 하나가 없어져도 나머지 하나가 있어 든든하지’ (이응준, 2006)라고 호언 했지만 그로부터 불과 일주일이 못 돼, 일련의 참극이 벌어진 것이다. 인생이란 하나를 잃으면 나머지 하나가 있어 든든한 그러한 성질의 것이 아님을 은조는 뚜렷이 기억하고 있다.

은조의 아물지 않는 상처에 대한 이야기는 대학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한적한 바닷가에 위치한 대학캠퍼스와 해송(海松)의 숲길 사이에서 배회하던 스무 살의 은조는 같은 과 4학년 여자선배를 만나 동거를 시작한다. 그녀와의 동거는 지방생활에 대한 외로움의 자위였으므로, 그 만큼 숨기고 싶었던 부끄러움의 대상이기도 했다. 입대하기 보름 전 그녀의 뱃속에 있는 아이와 함께 결별의 종지부를 찍는 순간에도 은조에게는 모든 것들이 처분해야 할 재고였고, 인생이란 경영에서 치욕적인 과오였다. 이 후 수많은 시간이 흐른 뒤에야, 외국에서 아들을 키우고 살고 있다는 그녀의 소식을 전해 들으며, 자신이 ‘그 시절 사창가 포주 취급받는 것이 싫었다면 그녀가 감당했을 치욕은 과연 얼마나 혹독한 것이었던가.’ (이응준, 2006)를 처음으로 헤아리게 된다.

또 하나의 인물은 은조의 절친한 벗이며, 영화감독인 병우이다. 그는 열두 살 무렵, 중학생이었던 사촌형이 공수병으로 죽어 가는 모습을 큰 충격 속에서 목도한다. 어린 병우의 평범치 않았던 경험은 그가 인간의 고통에 대해 집착하는 원인으로 작용하고, 훗날 병우가 영화감독이 된 뒤에도 작품의 주요테마가 되어 끊임없이 그를 괴롭힌다. 결국 그의 작품은 국제단편영화제에서 특별상을 받으며 큰 성공을 거둔다. 그러나 공수병에 걸린 사람이 망망대해 앞에서 경련을 일으키듯 죽음을 앞둔 병우의 마지막 편지 속에는 우울과 광기만이 엉켜있다.

마지막 인물은 은조의 연인이며, 과거 병우의 약혼녀였던 해원이다. 그녀는 일란성 쌍둥이이자 육손이로 고아원에서 태어났다. 그녀보다 3분 늦게 태어난 깨끗한 손의 동생은 첫돌 무렵 네덜란드로 입양되었다. 해원은 스물네 살 때, 남들보다 하나 더 웃 자란 손가락을 제거하기 위해 적금통장을 헐어 수술대에 올라갔고, 세 차례의 대수술을 끝으로 ‘제2의 새끼손가락’ 을 덜어낼 수 있었다. 해원의 이름도 점쟁이가 불우해지지 않을 수 있다고 하여 고아원에서 붙여준 촌스러운 이름을 버리고 개명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과거의 어두운 그늘을 벗어나지 못한 채, 선방(禪房)에서 짧은 생애를 마감한다.

‘아물지 않는 상처’ 를 가진 그들(은조, 병우, 해원)은 모두 고립된 주체들이다. 각자 특별한 방법으로 세상과 조우를 시도하지만, 파편화된 삶 속에서 개인은 ‘소외’ 를 경험할 뿐이다. 그들을 향해 손을 내미는 화해의 대상은 인간적 삶을 억누르며 살아 갈 것을 강요하는 견고한 현실이다.

‘나는 형광펜으로 씌어진 글씨는 제대로 읽지 못해요. 색맹에 색약이거든. (중략) 요즘은 한의원에서 침을 놓아 치료가 가능하다지만, 관심 없죠. 색깔은 내게 별 의미가 없거든.’ (이응준, 2006)

근대의 사회적 반항이라는 뇌관마저 제거해 버린 무기력한 시대, 각종 미시권력이 무의식을 점령한 사회에 그들은 ‘세상의 빛’ 을 온전히 보지 못한다. 소위 포스트모더니즘의 시대, 무기력한 자아의 모습이다.1) 색의 경계를 명확히 구분하지 못하는 자아는 문화의 상품화마저 아무런 거부감 없이 받아들인다. ‘미시권력이 욕망과 무의식의 영역까지 침투함에 따라, 문화의 상품화가 더 이상 불행으로 여겨지지 않는 시대’ (나병철, 1999)가 온 것이다. 이는 의료의 기계화(도구화)와 상품화가 당연시되고 있는 의학의 현주소이기도 하다.

16세기 르네상스에 의해 출현된 인간이성은 계몽이라는 미명 하에 점차 모든 것을 대상화시켜 나갔고, 객체와의 분리 속에 행해지는 주체의 ‘일방성’ 을 방법적 이상으로 취하기 시작했다. 결국 이러한 방법적 이상은 모든 대상을 사물화 시켜나갔고, 사물화는 다시 계량화, 수치화를 가능하게 하면서 평균화, 일반화를 이루었다(박남희, 2008). 현대의학은 이를 객관성과 보편성이라는 원칙 아래 진리로 삼고 있으며, 이때 진리는 실험과 관찰에 의해 검증이 가능한 것이어야 한다.

최근 근거중심의학(evidence-based medicine)을 규범으로 삼고 있는 병원들이 급속히 늘어가면서, ‘임상의’ 는 미리 설정된 알고리즘을 따라 수동적으로 움직이는 ‘도구’ 로, 그리고 ‘환자’ 는 과학적 의학에 필요한 ‘상품’ 으로 전락하게 된다. 현 의료 환경에서 이러한 ‘도구’ 와 ‘상품’ 은 소통의 필요성조차 느끼지 못한다. 오직, 무작위 대조시험(randomized controlled trial)이 나 메타분석(meta-analysis) 등의 과학적 실험데이터만이 필요할 뿐이며, 그 속에서 개인(임상의, 환자)은 점점 더 단절과 소외를 경험할 뿐이다. 이는 무의식마저 지배하는 미시권력의 특징으로, 개인은 강제력에 의한 것이 아닌 자발적으로 권력에 예속 된다.2), 자발적인 권력의 예속은 질병에 대한 사회적 통념까지 내 포한다.3)

“사람이란 것들이 외다리, 외팔이는 웬만함 동정해주지. 신체가 훼손된 장애인에게는 싫다는 감정 이전에 일단 측은한 마음이 먼저 드는가봐. 그치만 기형 장애인인 육손이를 접하면 구역질 같은 혐오가 알량한 동정마저 휩쓸어버린다구요. 손가락이 하나 없으면 사고를 당한 인간이지만, 손가락이 하나 더 있으면 잘못 태어난 괴물인 거야. 육손이의 고통이 고작 색맹이나 색약 따위와 비교될 순 없어요.”(이응준, 2006)

‘이마에 뿔이 돋는 병이 있다면 사람들은 어떻게 할까?’ ‘용어를 짓고, 제거수술을 하고, 그래도 힘들어했겠지.’ (이응준, 2006)

어쩌면 우리 모두가 덧붙어 솟아난 손가락 하나씩을 가지고 살고 있을지 모르지만,4) 해원의 왼손은 항상 바지 호주머니 속에 숨어 있다. 그녀의 왼손을 호주머니 속에 숨게 한 것은, 그리고 그녀를 영원히 세상 밖으로 숨게 한 것은 어쩌면 우리가 정해놓은 ‘광기’ 와 ‘감시의 시선’ 때문일지도 모른다. 푸코가 정의한 ‘광인을 규정짓는 또 다른 광인의 모습’ (Michel Foucault, 2003) 이 해원의 상처를 통해 드러난 셈이다. 그동안 사회라는 거대권력 속에 편입되기 위해 광인과 스스로를 구별 지으려 했던, 우리의 모습이기도 하다. 이러한 시선 앞에서 현대의학이 할 수 있는 것은 ‘용어를 짓고 제거수술을 하는 것’ 뿐이다. 전인적 소통 관 계맺음은 과학적 의학의 범주 안에서, 이제 낡고 무능력한 것이 되었으며 의학은 더욱더 객관적이고 검증된 데이터로 환자를 진단하고 처방해야만 했다. 때론 권위라는 이질적 관계를 형성하면서까지, 개인의 고통보다는 솟아난 손가락을 자르는 것이 더욱 중요해졌다.

시대가 변천해가면서 의학의 권력행사는 여러 파행을 거듭하지만, 꽤나 오랜 시간 의학은 환자들 위에 군림했다. 거대 자본주의 사회 속에서 의학이 변함없이 독보적인 위치를 고수할 수 있었던 것은, 환자와의 관계맺음을 포기하면서까지 추구했던 과학적 의학 덕분일 것이다. 그러나 의사의 공급과잉이 지속됨과 더불어 의사들의 전통적인 권력침식, 경제적 취약성의 증가, 일터에서의 소외 등으로 인하여 의학은 권위조차 잃어가고 있다.5)

현대사회는 과학적 의학만으로 개인을 위로할 수도, 그리고 그들의 동의를 얻을 수도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권력을 행사하며, ‘광인’ 을 규정짓는 의학은 종종 사회적 조롱거리가 되기도 한다.6), 이렇듯 불편한 관계맺음은 ‘광인’, 그리고 ‘환자’ 를 바라보는 시선의 차이에서 연유할 때가 많다. 이는 효과적 치료를 목적으로 발병(發病)되지도 않은 질병을 찾아내곤 하는 현대의학의 병리적 풍토에서 비롯한다.7) 병의 진행을 사전에 차단할 수 있다는 효용성의 가치에만 매몰되어 질병과 일상의 경계까지 허물고 있는 의학의 현주소라 할 수 있다.

끊임없는 갈증, 恐水病

현대의학은 자연과학의 토대 위에 발전을 거듭해 왔기 때문에 인간에 대한 이해에서부터 구체적 치료의 방법까지 모두 자연과학을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기술적 장비를 통해 잘못된 몸의 메커니즘을 찾아내면 이를 회복시키는 일에 매진하는, 원인과 결과에 입각한 치료행위가 무수히 반복되었다(박남희, 2008). 그러나 인간의 병리현상은 유기체의 조절 메커니즘 내에서 발생하는 양적인 변화만을 가지고 설명할 수 없다. 이는 단순히 무엇의 과잉이나 결핍을 통해서 접근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라는 것이다(이수영, 2008).

질병이란 과학적 의학이 선언하는 결과가 아닌 고통을 받는 사람들의 경험이며, 세계에 대한 관계의 맺음에 있어 균열을 의미이다. 따라서 건강의 상실, 그리고 방해받지 않는 ‘자유’ 의 상실로서, 질병에는 일종의 ‘삶의 배제’ 가 포함되어 있다(Hans- Georg Gadamer, 2002). ‘온혈동물만이 공수병을 경험한다.’ (이응준, 2006)라는 작가의 또 다른 명제는 이러한 ‘삶의 배제’ 를 내포한다.

‘해원은 바지만을 고집한다. 본능으로 굳어진 그녀의 절박한 습관이랄 수 있겠는데, 바지 호주머니 속에 손가락이 여섯 개 달린 왼손을 숨기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로 인한 오해는 종종 봉변을 불러와, 노처녀 음악선생은 다른 학생들 앞에서 왼손을 바지 호주머니 안에 찔러 넣고 오른손으로는 악보를 비스듬히 든 채 성악 시험을 치르는 해원의 뺨을 후려친 뒤 그녀의 왼손을 바지 호주머니에서 강제로 빼내 보고는 곧장 졸도했던 것이다. 해원은 여고를 3개월만에 자퇴하고 다시는 여럿이 한꺼번에 비명을 지르는 곳에 가지 않는 독학자가 되었다.’ (이응준, 2006)

질병이 심리적 균형뿐만 아니라 개인의 삶 전체에까지 영향을 미치는 것은 우리의 무의식이 규정한 배제의 원리 때문이며, 이는 개인(해원)으로 하여금 ‘본능으로 굳어진 절박한 습관’ 을 낳게 하였고, ‘여럿이 함께 있는 곳에 가지 않는 독학자’ 가 되게 하였다. 세 차례의 대수술을 해야 할 만큼 질기게 텃세를 부린 그녀의 여섯 번째 손가락만큼이나, 병리에 대한 사회의 시각은 참으로 억압적이며 객관적이지 못하다. 따라서 인간의 삶은 언제나 질병이라는 온전함의 상실로 인해 항상 끊임없는 위협과 상처를 받게 된다.

그(병우)는 영화제 참석 후 북유럽으로 여행을 떠나려는 와중에 베를린의 한 호텔방에서 내게 장문의 편지를 띄웠더랬다. 그는 공수병에 걸린 사람이 망망대해 앞에서 경련을 일으키고 있다고 했다. 그리고 온혈동물만이 환각이 있고 우울이 있고 목이 타도 물을 마시지 못하는 죽음이 있다고, 다이아몬드가 다이아몬드인 것은 아름다우면서도 단단하기 때문이고 또한 그런 것들은 희귀 하기 때문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내 뜨거운 피의 죄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었다.(이응준, 2006)

개인은 사회의 범위 안에서 스스로의 삶을 만들어 가고, 그 세계 안에서 편안함을 느낀다. 따라서 불안이란 세상의 방대함과 낯섦에 갑자기 노출되었을 때 느끼는 답답함과 관련되어 있다 (Hans-Georg Gadamer, 2002). 개인은 이러한 편안함과 불안 속에서 끊임없이 줄다리기를 하지만 애초 길들여질 수 없다는 배제의 의식은 개인을 ‘목이 타도 물을 마시지 못하는 죽음’ 으로 내몰게 된다. 이러한 배제의 의식은 길들이기로서의 권력행사라 할 수 있는 ‘파놉티콘’8) 을 근간으로 한다.

현대사회로 넘어오면서 특정 구역만을 주시하던 ‘감시의 시선’ 은 더 이상 한계가 없는 ‘통제사회(control society)’로 확대 ‘되고, 중앙탑의’ 강제적 감시 ‘는 뚜렷하지 않은 피감시자의 자 발적 협조와 함께’ 역감시 ‘로 진화를 거듭한다(홍성욱, 2001). 이제 개인은 어둡고 폐쇄된 공간 대신, 항상 시선에 노출되어 있는’ 빛의 무대 ‘속에서 자유롭게 활동할 수 있다. 그러나 그 빛의 자유는 곧 감시의 대상일 뿐이며, 낯설고 방대한 공간 속에서 개인은 불안과 배제의 심리만이 더욱 증폭된다.9)

현 의료환경 또한 역감시라 할 수 있는 상호 통제를 기반으로 한다. 이젠 환자 개인도 손쉽게 네트워크를 활용하여 병에 대한 자가진단과 함께 의료서비스를 제공받을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상호통제가 확대될수록 임상의(도구)와 환자(상품)는 스스로의 목소리를 잃어가고, 다만 과학적 의학의 통제 아래 움직이게 된다.10), 과거 법으로서 행해진 규율의 권력이’ 의식 ‘의 차원을 지배했다면, 삶 속에서 과학화된 규율의 권력은’ 무의식 ‘을 지배한다. 이렇듯 일상의 권력은 과학화된 규율을 진리로 표방함으로써 경계를 이탈하는 사람들을 비합리적이고 비과학적인 무능력자로 배제시킨다.11) 따라서’ 예측할 수 없는 폭력적 세상 앞에서 사람답게 대응하는 방식이 최소한 말없이 사는 것, 더 나아가 죽음으로 응전하는 것’ (서경석, 2006)밖에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던 것이다.

“소원은 동생을 만나고 싶다는 것뿐이에요. 어젯밤에 환상통이 찾아왔었어. 이 방에는 거울이 없어서 수홍루에 나가 달빛 어린 물에 내 얼굴을 비춰봤어요. 흉한 얼굴이 그 애의 얼굴이면 절대 안 되지. 이제는 나를 봐도 동생을 볼 수가 없었어요. 징그러운 잉어놈들이 물위에 어린 내 얼굴을 지워줘서 다행이야.”(이응준, 2006)

해원은 아름다운 동생의 모습을 보기 위하여 수홍루에 자신의 얼굴을 비추지만, 달빛 어린 물에는 얼룩진 현실의 모습만이 투영될 뿐이다. 현실에서는 불가능한 꿈을 수홍루라는 미적가상을 통해서라도 창출하려하지만, 물속에 비친 그녀의 세계조차 유토피아를 그리지 못하고 있다. 더 이상 꿈조차 꿀 수 없는 세상, 바로 작품에서 그리고 있는 현실의 모습이다. 이러한 부정적 시각은 기형적인 손가락을 제거하고 촌스러운 이름까지 개명하면서도 자살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해원과, 단편영화의 성공을 뒤 로한 채 생을 마감한 병우의 모습에서도 극명하게 드러난다.

반대로, 현실에 남아 살아가는 개인(은조)은 끊임없이 욕망을 추구하며 망망대해 앞에서 갈증을 느낀다. 개인에게는 욕망의 이미지들이 한결같이 결핍을 충족시켜주는 대상으로 비쳐지지 만, 이러한 이미지들은 지시대상을 갖지 않는 시뮬라크르(simulacre) 12)이며, 실재를 대체한 오브제(objet)에 불과하다. 목이 타 들어가도 물을 마시지 못하는 공수병의 이미지처럼 욕망과 결핍 사이에는 균열만이 존재한다.

개인을 사물화 시키는 주변의 시선, 그리고 더 나아가 스스로 를 대상화 시키는 자기시선에 대한 두려움, 이러한 공포감이 작품에서는 해체13)와 함께 불편한 재구성(콜라주, collage)으로 드 러난다.

“지구에서 50광년 떨어진 반인반마(伴人半馬) 자리에 직경 천오백 킬로미터의 다이아몬드가 찬란히 빛나고 있는 것이다. 정식 명칭은 BPM37093이지만 천문학자 들은 비틀즈의 노래 <Lucy in the sky with diamond>를 기려 이 도도한 여인을 루시라 부른다. 지구에서 제일 큰 다이아몬드래 봤자 삼천백 캐럿짜리 원석을 가공한 오백삼십 캐럿의 ‘아프리카의 별’ 이 고작인데 루시는 대충 계산해도 10의 34제곱 캐럿 이상이다. 핵융합 반응 이 소진되어 탄소결정체로 생을 마감한 백색왜성白色 矮星루시는 죽음자체가 곧 다이아몬드인 셈이다.”(이응준, 2006)

“조선 숙종 때 단유선사가 사찰을 중수할 무렵 큰 구렁이가 샘가에 나타나 인부들이 벌벌 떨며 일손을 놓는 고로 한 스님이 용기를 내어 잡아 죽였다. 한데 이후로는 샘이 말라버리니, 본래의 감은사에서 샘이 숨었다는 뜻의 천은사(泉隱寺)로 이름이 바뀌게 된 것이다.”(이응준, 2006)

“1962년 독일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 주의 오버하우젠. 제8차 서독 단편영화제에서 스물여섯 명의 신예 영화감 독들이 연대해 위와 같은 요지의 선언을 했다. 뉴 저먼 시네마의 출발을 알리는 문화사적인 장면이었다. 이로써 일약 유명해진 서독 단편영화제는 1991년 현재의 오버하우젠 국제 단편영화제로 개명된다. 세계에서 제일 먼저 생긴 단편영화제로서 프랑스의 클레르몽페랑 국제 단편영화제, 필란드의 탐페레 국제 단편영화제와 더불어 세계3대 단편영화제로 꼽힌다. 비상업 경쟁 영화제이며 실험적이고 전위적인 작품들을 선호한다.”(이응준, 2006)

마치 신문에서 스크랩한 기사들을 하나하나 다시 오려붙인 듯, 조화롭지 못한 내용들이 작품 요소요소에 배치되며 하나의 완성된 플롯을 형성하고 있다. 단순한 이야기의 나열이지만, 그 하나하나는 병우가 해원의 왼손에 끼워주려 했던 약혼반지이고, 해원이 삶의 마지막을 정리하려 했던 선방(禪房)이었으며, 병우가 세상과 소통하려했던 국제단편영화제였다. 이는 모두 작품 속 인물들이 불우를 극복하기 위해 매달렸던 대상이다. 해체된 이야기들은 작품의 결말부에 이르러 다시 불편한 조합을 이룬다.14)

“감은사가 천은사가 되고 고아원에서 지어준 어떤 촌스러운 이름에서 해원이 되고 서독단편영화제가 오버하우젠 국제 단편영화제가 되고, 이제 나는 나의 이름을 무엇으로 바꾸어야 하는가? 해원, 너는 왜 너의 새로운 이름을 가지고서도 불우를 극복하지 못했다지?”(이응준, 2006)

지난 과오에 대한 후회와 자책 속에, 울분을 토해내듯 내뱉는 은조의 독백들은 결국 해원의 불우한 삶에 대한 물음으로 귀결된다. 단 둘이 있으면서도 아무런 대화가 없었던 은조와 해원의 관계가 그러했듯이, 그의 독백에는 항상 균열과 단절이 있다. 이렇듯 세계를 그리는 과정에서 현실이라는 지시대상이 균열되고 단절되는 현상, 즉 ‘해체’ 의 모습은 포스트모더니즘의 가장 큰 특징이라 할 수 있다. 모더니즘이 ‘비동일성’ 의 의식을 매개로 ‘동일성’ 의 세계에 대항했다면, 포스트모더니즘은 ‘동일성’ 의 세계를 ‘차이’ 로 해체한다. 여기서 ‘차이’ 는 기존의 상징계(象 徵界, symbolic)에 의해 주변화된 또 다른 상징계이다(나병철, 1999). 작품은 이러한 ‘해체’ 를 통하여 존재의 상실에 대한 끊임 없는 그리움과 욕망을 피력한다. 이는 곧 세상과의 조우, ‘약혼’ 에 대한 희망이기도 하다.

約婚그리고 幻想痛

‘약혼’, 혼인을 기약하듯이, 세상에 함께 하는 모든 것들이 서로에게 존재의 예속됨을 약속하듯이, 작가가 바라보는 모든 대상은 한결같이 소중한 서로의 일부분이다. 그러나 ‘앞으로 계속 살아가기 위해선 더욱 더 심하게 망가질 수밖에 없으리라’ (이응준, 2006)는 것처럼, 세상과 화해하고 싶은 작가의 열망은 끊임 없는 번민 속에 이루어지며, 종종 환상통(幻想痛, phantom pain)으로 찾아오기도 한다.

가끔씩 그녀는 존재하지 않는 왼손 여섯 번째 손가락에서 심한 통증을 느낀다는 것이다. 흉터로 남아 있는 수술자국 위에 버젓이 제2의 새끼손가락이 달려 있는 듯 하고 또 종종 그것이 마구시리고 쑤셔대 참을 수가 없단다. 의사들이 이른바 환상통(幻想痛)이라 명명하는 이 증상이 몸의 일부분을 절단한 장애인들 사이에서는 감기만큼 흔하다는 사실이 좀체 믿기지 않았다.(이응준, 2006)

‘나는 전철 손잡이를 잡고 있는 그녀의 오른손과 골반 아래께로 늘어뜨려져 있는 왼손을 번갈아 주목했다. 상처에 찌들지 않은 귀하고 섬세한 손. 해원이 그리워했던 맑은 손이었다. 나는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나 그녀에게로 다가갔다. 그녀가 나를 엉뚱하다는 표정이 되어 쳐다 보았다. 나는 그녀의 눈동자를 깊이깊이 가슴에 새겼다.’ (이응준, 2006)

헬싱키 외곽 침엽수림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은 병우와 이른 새벽 선방에서 숨진 채 발견된 해원 모두 은조에게는 하나 더 있는 손가락을 잘라 낸 흉터만큼이나 깊은 상처의 기억으로 자리 잡게 될 것이다. 은조가 지하철 2호선에서 만난 ‘상처에 찌들지 않은 귀하고 섬세한 손’ 을 가진 해원은 입양된 해원의 쌍둥이 동생일지도 모르며, 은조가 겪고 있는 환상통의 한 단면일지도 모른다. 그것으로 인하여 참을 수 없는 고통에 힘들어 하기도 하지만, ‘그녀의 눈동자를 가슴 속 깊이 새기는 것’ 은 세상과의 조우에 대한 열망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실은 항상 부정적이기만 하다.

“나는 유언대로 아무에게도 연락하지 않았으며 그녀의 시신을 광주로 데려가 화장시킨 뒤 수홍루가 서있는 무지개다리 아래에 뼛가루를 뿌렸다. 내 손바닥에서 흘러 내린 봄눈이 달빛 먹은 수면에 스미자 신라 여왕의 영혼 같은 비단잉어들이 몰려들고 튀어올라 캄캄한 산사(山 寺)의 적막을 괴롭혔다.”(이응준, 2006)

은조의 손에서 뿌려진 해원의 뼛가루가 비단 잉어들에 의해 수면에조차 잔잔히 스미지 못하는 것은 결국 세상과의 ‘약혼’ 자체가 애당초 불가능하다는 것을 말해준다.15) 그러나 ‘귀를 막아 억지로라도 심장 뛰는 소리를 듣듯이’ (이응준, 2006), 그렇게 해야지만 ‘억지로라도 살아 있다는 사실을 감각하며 살 수 있듯이’ (이응준, 2006), 상처뿐인 세상이지만, 온혈동물이기 때문에, 그리고 사람이기 때문에 작가는 ‘존재의 예속됨’을 기약하고 싶어 한다.

『약혼』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고통과 상처는 결국 미메시스의 부재로 인한 환상통이라 할 수 있다. 환부가 따로 존재하지 않기에, 그들의 아픔은 과학적 의학만으로 판단할 수 없다. 개인을 보듬지 못하는 무기력한 현대의학의 모습이다. 1990년, 서사중심 의학(Narrative-Based Medicine)의 출현은 이러한 의료계의 고민과 맥을 같이한다. 리타샤론의 논의를 빌리자면, 서사중심의학이란 ‘질병체험 이야기를 인식 흡수 해석하며 감동받을 수 있 는, 서사적 기술과 함께 수행되는 의학’ (Charon, R., 2006)을 뜻 한다. 현대의학에도 점차 소통의 필요성이 대두하면서 ‘서사’에 대한 논의가 본격화된 것이다.16)

실제 임상현장에서 서사는, 많은 부분 사건의 일관성과 형체 해석 동기부여 등 객관성의 공백을 책임지곤 한다(Misak, C.J., 2010). 이는 일반적인 자연과학과 다른 점으로, 의학이 ‘개별자를 대상으로 하는 과학’ (황임경, 2011)이기 때문이다. 근거중심 의학의 황금표준(Gold standard)인 무작위대조시험(randomized controlled trials)과 메타분석(meta-analysis)도 실험의 결론을 매듭지을 수 있지만, 실제 임상에 적용할 수 있는 범위는 너무나 협소하다(Misak, C.J., 2010).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 의료계에 서는 객관적인 연구근거(research evidence)만을 절대시하며 판단의 척도로 삼고 있다. DNA분석과 MRI 스캔 등의 과학적 기술이 의사의 판단을 대신한다하더라도 여전히 의학은 사람과 사람의 만남이다.

“마취에서 깨어나자마자 담당의사더러 잘라낸 손가락을 보여 달라고 그랬거든. 나이든 고등학교 체육선생님처럼 생긴 아저씨였는데, 한참 침묵하다가 이러더라. 그걸 처분해주는 것까지가 내 수술이야. 네 머릿속에서 지워버리는 건 하나님께서 하실 일이고. 그 의사 선생님한테 감사하고 있어요. 만약 내가 그걸 가져다 어디다가 손가락 무덤이라도 만들었다면 훨씬 피곤했을 거야. 안 좋을 적마다 가서 들여다보고. 그게 뭐 대단한 재난이라고.”(이응준, 2006)

세상의 시선은 철저한 냉대와 경멸로 가득하지만, 작가는 ‘침울한 정조 속에서도 만물 사이의 조화를 가능케 할 싹인 진정한 소통의 가능성’ (류보선, 2006)을 포기하지 않는다. 해원의 마음 속 질병까지 치유하고자했던 작품 속 의사의 모습처럼 말이다. ‘신’ 을 대신하여 그녀의 머릿속 기억까지 지워주진 못했지만, 힘겹게라도 세상 앞에 설 수 있도록 따뜻한 손을 내밀고 있다. 결국 세상과 타협할 수 없어 다다른 죽음마저 작가에게는 ‘백색왜성 루시(Lucy)의 죽음’ (이응준, 2006)인 ‘다이아몬드’ 였던 셈이다. 온갖 병리적 시선들이 개인과 그들이 사는 세계까지 규정짓는 포스트모더니즘의 현대사회, 그리고 현대의학 속에서 끊임없는 존재의 물음과 병리에 대한 천착만이 개인과 세상과의 간극을 줄일 수 있는 길이 될 것이다.

결 론

지금까지『약혼』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상처를 조망하며, 점차 과학일변도를 보이는 현대의학의 문제점에 대해 고민해 보았다. 특징적 내용과 연구의 의의를 간단히 언급하는 것으로 맺음말을 대신하려 한다.

작품에서 거론되는 개인의 병리(病理)들, ‘세상의 빛을 온전히 보지 못하는 병(色盲)’ 과 ‘끊임없이 갈증을 느끼면서도 목을 축일 수 없는 병(恐水病)’ 은 결국 미메시스의 부재로 인한 환상통(幻想痛)이라 할 수 있다. 억지로라도 상처 있는 곳을 잘라내지만 여전히 그 자리가 가렵고 고통스러운 것은, 소통할 수 없는 사회와, 그리고 개인을 보듬지 못하는 무기력한 현대의학의 모습 때문이다.

‘약혼(約婚)’, 혼인을 기약하듯이, 세상에 함께 하는 모든 것들이 서로에게 존재의 예속됨을 약속하듯이, 작가가 바라보는 모든 대상은 한결같이 소중한 서로의 일부분이다. 작가는 세상과의 ‘약혼’ 자체가 애당초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진정한 소통의 가능성을 포기하지 않는다. 세상과 타협할 수 없어 다다른 죽음마저 작가에게는 루시(Lucy)의 죽음처럼 가치 있고 숭고하기까지 하다. 온갖 병리적 시선들이 개인과 그들이 사는 세계까지 규정짓는 포스트모더니즘의 현대사회, 그리고 현대의학 속에서 끊임없는 존재의 물음과 병리에 대한 천착만이 개인과 세상과의 간극을 줄일 수 있는 길이 될 것이다.

본고에서는 단지, 짧은 문학작품의 소개를 통해 의학 패러다 임의 전환을 운운하는 것이 아니다. 아직 ‘문학과 의학의 만남’ 이 낯설기만 한 의료현장에 의료인문학에 대한 관심을 넓힘과 동시에, 의학교육에 있어서도 인문학의 중요성을 인식했으면 하는 바람에서 비롯되었다. 이를 시작으로 미메시스가 상실된 시대, 그리고 의학의 위기 속에, 그 해법에 대한 고민을 인문학에서 찾았으면 하는 작은 기대를 가져본다.

Notes

1)

자본주의를 시장(자유경쟁)자본주의, 독점자본주의(제국주의), 후기자본주의의 세 단계로 나눈 에르네스트 만델의 분류에 프레드릭 제임슨은 각각 리얼리즘, 모더니즘, 포스트모더니즘을 대응시켰다. - Ernest Mandel, 이범구 역(1985), 후기자본주의, 한마당; Fredric Jameson, 정정호 강내희 역(1989), 포스트모더니즘-후기자본주의 문화논리, 포스트모더니즘론, 터, 참조.

2)

모더니즘 시대가 동일성 세계에 반항하는 비동일자가 소외를 겪는 시대였다면, 포스트 모더니즘적 사회는 무의식적으로 상품논리의 욕망에 탐닉하면서 허무 와 좌절을 경험하는 세계이다. - 나병철(1999),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을 넘어서, 소병출판. 257 인용.

3)

18세기 중반까지만 해도 질병은 공기와 도덕성의 부패와 관련이 있어 신의 의지가 곧 궁극적 질병의 원인으로 여겨졌고, 심지어 일반인들 사이에서는 마술의 결과이거나 마녀의 마법 또는 사탄이나 악마의 소유' 일 것이라는 생각도 광범위하게 퍼져 있었다. - Deborah Lupton, 김정선 역(2009), 의료문화의 사회학, 한울, 132-136 참조.

4)

왼편 손가락 여섯 개로 태어난 쌍둥이 언니 해원

감출래야 감출 수가 없던 그 솟아난 새끼손가락

우리 몸에 붙은 덧붙어 솟아난 손가락 하나씩 없다고

누군들 장담할 수 있으랴! - 정현기(2007), 이응준의 약혼(146), 흰방울새와 최익현, 푸른사상.

5)

여전히 의사-환자 관계에서의 권력이 의사들에게 쏠려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의사의 견해를 물을 것인지, 계속해서 도움을 얻을 것인지, 치료방법에 순응할 것인지에 대한 것은 환자의 결정에 달려있다. 더군다나, 만성질환 환자, 의학적으로 자격을 갖춘 환자, 높은 사회계층에 속하거나 교육수준이 높은 환자 등은 더욱 그러하다. - Deborah Lupton (2009), 앞의 책, 187-195 참조.

6)

KBS ‘개그콘서트’ 의 ‘9시쯤 뉴스’ 코너에서, 기자와 함께 의사가운을 입은 인물의 우스꽝스러운 언행과 태도가 연일 화제이다. 한 방송분(2월27일)에는 미술의 폭력성을 알아보겠다며, 실기시험에 대비해 과제를 그리고 있는 미대생의 작품을 찢은 뒤, 화를 조장한다. 이후 기자와 의사(심리학 박사)는 미대생의 과격 한 언행을 살피며, 미술이 이러한 폭력성을 생산한 것이라 규정한다. 특정 언론(MBC 뉴스)을 패러디한 코너지만, 이는 평범한 일상까지 규정짓는 현대의학의 모습과 이를 조장하는 사회의 병리적 풍토를 풍자한 것이라 할 수 있다.

7)

의학적인 검사를 하면서, 이전까지 건강했던 사람들도 자기 몸의 건강에 의문을 제기하며 검사결과를 기다린다. 그 동안 환자는 불안에 떨게 되고, 소리 없이 몸에 침입해서 기다리고 있는 비밀스러운 질병을 인식하는 상태에 이르게 된다. 크로포드(crawford)는 이러한 불안 상태를 ‘잠재적인 환자 역할’ 이라고 부른다. 검사결과가 양성으로 나오면 질병에 이름을 붙이고 몸에 증상이 나타나기도 전에 질병을 찾아낸다. - Deborah Lupton (2009), 앞의 책, 164-167 참조.

8)

영국의 공리주의 철학자 제레미 벤담이 1791년에 제안한 원형감옥의 건축양식. 파놉티콘은 당시 망원경과 비슷한 광학기구를 지칭하는 용어로 가끔 사용되었 는데, 벤담은 그리스어로 ‘다 본다’ (Pan: all + Opticon: seeing 또는 vision)라는 의미를 가진 이것을 자신이 설계한 감옥을 지칭하는 용어로 새롭게 사용했다. - 홍성욱(2002), 파놉티콘 - 정보사회 정보감옥, 책세상 인용.

9)

파놉티콘의 감옥구조는 폐쇄적인 규율과 폭력적 배제(어둠)의 원리에서 개인적인 규율과 삶(빛)의 원리로 권력행사 방식이 바뀌었음을 의미한다. 푸코는 감 옥구조뿐만 아니라 공장, 학교, 병영, 병원 등의 규율기관 역시 유사한 감시장치의 구조를 지니고 있다고 말한다. - Michel Foucault, 오생근 역(1994), 감시와 처벌, 나남, 267-302 참조.

10)

푸코는 담론에 부과되는 세 가지의 커다란 배제(exclusion)의 체계로 ‘금지된 말(금지)’, ‘광기의 분할(분할과 배척)’, ‘진리에의 의지(진위의 대립)’ 를 들고 있는데, 가장 분명하면서도 가장 친숙한 것은 ‘금지된 말’ 이고, 이는 배제의 가장 명확한 요소이다. - Michel Foucault, 이정우 역(2011), 담론의 질서, 새길, 13-21 참조.

11)

법적 규율의 방식이 이탈자에 대한 가혹한 처벌을 수단으로 한다면, 삶의 방식(과학적 규율의 방식)의 권력은 동조자에 대한 능력과 힘의 증대를 수단으로 한다. 즉, 전자가(법으로써) 규율의 강요와 욕망의 억압을 수반하는 반면, 후자는 오히려(과학의 규율로써) 삶의 힘과 욕망을 확장시키는 방법을 사용한다. 이 점에서 삶의 방식의 권력, 곧 보이지 않는 경계선을 만드는 감시장치의 권력은, 삶의 능력을 함양하는 욕망의 장치의 전략에 상응한다. 욕망의 장치는 감시장치와 함께 ‘무의식’ 을 지배하는 권력행사 방식인 셈이다. - 나병철(1999), 앞의 책, 275 인용.

12)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 대상을 존재하는 것처럼 만들어 놓은 것으로 흉내낼 대상이 없는 이미지이며, 이 원본 없는 이미지가 그 자체로서 현실을 대체하고 현실은 이 이미지에 의해서 지배 받게 되므로 오히려 현실보다 더 현실적인 것이다. - Jean Baudrillard, 하태환 역(2001), 시뮬라시옹, 민음사, 역자주 인용.

13)

포스트모더니즘의 가장 중요한 어귀인 해체(deconstruction)가 건축에서 나온 메타포임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중략) 우선 이 단어는 구성 또는 건설이라는 의미의 ‘construction’ 에 부정의 의미가 담긴 ‘de-’라는 접두어를 붙여 만든 신조어이다. 이것은 단지 파괴를 의미하는 ‘destruction’ 이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어떤 구조물을 구성 원리로부터 해체한다는 분명한 의식을 가지고 철저하게 뜯어내는 작업을 의미한다. - 신국원(2008), 포스트모더니즘, IVP, 131-132 참조.

14)

(포스트모더니즘에서) 진리추구를 일원론 관점에서 바라다본다는 것은 전혀 무의미한 것이다. (중략) 이러한 탈일원론적 진리관에 의한 사유의 과제란 형이 상학 이후의 사유, 즉 하이데거의 ‘형이상학 역사의 해체’ 에 근거한 사유에 힘입고 있다. 해체는 물론 새롭게, 그리고 달리 재구성하려는 의도에서 기인한다. 이러한 사고의 발전은 항상 ‘해체의 작용 이상으로, 또는 달리 말해서 재구성의 작용과 동일시’ 된다는 특성을 지닌다. - 신승환(2009),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한 성찰, 살림, 41-42 인용.

15)

미적가상(假像, Asthetische Scheinung)은 때때로 현실에서 이루지 못하는 ‘미메시스적’ 경험을 실현하곤 한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가상에 의해서만 가능한 것이며 현실은 화해가 불가능하다. - 나병철(1999), 앞의 책, 42-55 참조.

16)

인문학에서 말하는 서사(narrative)는 다양한 의미를 내포하지만, 리타샤론의 용어(Rita Charon, 2007)는 ‘환자의 불명확한 언어’, ‘임상의가 인지하는 환자의 이야기’ 정도로 이해되며, 이야기(story)의 개념과 큰 차이를 보이지 않는다.

References

김유동 역. 1995. 계몽의 변증법, 문예출판사
김정선 역. 2009. 의료문화의 사회학, 한울
나병철. 1999.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을 넘어서, 소병출 판
류보선. 2006. 해설: 신-인간 되기의 반시대성과 윤리성 약 혼: 문학동네.
박남희. 2008. 야스퍼스와 가다머의 의철학, 칼야스퍼스 비 극적 실존의 치유자, 철학과현실사
서경석. 2006. 약혼 작품해설: 지상의 고통, 다이아몬드로서 의 죽음, 2006 올해의 문제소설, 푸른사상
신국원. 2008. 포스트모더니즘, IVP
신승환. 2009.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한 성찰, 살림
오생근 역. 1994. 감시와 처벌, 나남
이규현 역. 2003. 광기의 역사, 나남출판
이범구 역. 1985. 후기자본주의, 한마당
이수영. 2008. 섹슈얼리티와 광기, 그린비
이유선 역. 2002. 철학자 가다머 현대의학을 말하다, 몸과마 음
이응준. 2006. 약혼, 문학동네
이응준. 2006. 약혼, 2006년 올해의 문제소설, 푸른사상
이정우 역. 2011. 담론의 질서, 새길
정정호 & 강내희 역. 1989. 포스트모더니즘-후기자본주의 문화논리, 포스트모더니즘론, 터
정현기. 2007. 이응준의 약혼(146), 흰방울새와 최익현, 푸른 사상
하태환 역. 2001. 시뮬라시옹, 민음사
홍성욱. 2001. 벤담의 파놉티콘에서 전자 시놉티콘까지, 한 국과학사학회지, 23 69–96.
홍성욱. 2002. 파놉티콘-정보사회 정보감옥, 책세상
황임경. 2011. 의학과 서사, 서울대 의과대학 박사학위논문
Charon R.. 2006. Narrative medicine: Honoring the stories of illness, Oxford university
Charon R.. 2007;What to do with stories: the sciences of narrative medicine. Canadian Family Physician₩Le Medicin de famille canadien 53:1265–1267.
Misak C.J.. 2010;Narrative evidence and evidence-based medicine. Journal of Evaluation in Clinical Practice 16:392–397.

Article information Continu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