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orean Med Educ Rev > Volume 28(2); 2026 > Article
침상 곁에서 마주하는 연약함: 의학교육에서 문화예술이 서야 할 자리
최근 몇 년간 한국 의료계와 사회가 마주해 온 깊은 갈등과 균열의 시간은 우리에게 단순히 정책적 대립 이상의 근본적인 질문을 던진다. 병원 로비와 진료실, 대학의 강의실 곳곳에서 들려오는 “도무지 서로를 이해할 수 없다”는 탄식은 단순히 소통기술의 부족이나 정보의 비대칭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의학과 사회, 그리고 의료인과 환자가 서로를 바라보는 서사적 해석의 틀이 어긋나 있음을 가리키는 징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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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학적 사실과 과학적 수치가 지배하는 병원이라는 공간에서, 의료실천이 시작되는 가장 근원적인 자리는 언제나 환자가 누운 침상(寢牀) 곁이다. 우리가 매일 쓰는 ‘임상(臨床)’이라는 말 자체가 이미 그 자리를 가리킨다. 임상이란 침상(床)에 임(臨)하는 일, 곧 환자가 누운 자리 곁에 다가서는 일이다. 서양에서 임상을 뜻하는 ‘clinical’ 또한 침상을 뜻하는 그리스어 클리네(klinē)에서 나왔으니, 동서가 같은 진실을 한 단어에 새겨 둔 셈이다. 그러나 이 침상은 한낱 가구로서의 침대가 아니라, 한 인간의 근원적인 연약함과 취약성이 드러나는 사건이 일어나는 시공간이다. 이때의 취약성은 단순히 힘이 빠지거나 신체적 기능이 결핍된 상태를 뜻하지 않는다. 그것은 질병과 고통, 그리고 죽음 앞에서 인간 존재가 자기 통제력을 잃고 타인에게 자신을 온전히 노출할 수밖에 없는 근원적인 인간학적 조건이다. 임상의학이 곧 침상 곁의 의학이라면, 의학교육의 과제는 바로 이 클리네에서 마주하는 취약성을 어떻게 읽어내고, 그 속에서 어떻게 돌봄의 실천을 이끌어낼 것인가에 있다. 이번 ‘의학교육에서의 문화예술의 가치’ 특집의 세 원고는 이 질문에 대해 역사적, 실천적, 그리고 철학적 지평에서 응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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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학교육에서 인간에 대한 이해를 넓히려는 노력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Huh와 An [1]의 “한국 의과대학의 예술 기반 의학교육 현황: 서술적 문헌고찰”은 2000년 의약분업 사태 이후 한국 의학교육에 도입된 의료인문학의 역사적 궤적 위에서, 예술 기반 의학교육 연구의 지형을 체계적으로 매핑한다. 당시 사회적 진통 속에서 의사의 전문직업성과 사회적 책무성, 소통능력을 기르기 위해 인문학적 소양이 강력히 요청되었고, 이는 의과대학 평가인증의 필수 기준으로 안착되는 성과로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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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서술적 리뷰는 여섯 개 국내외 데이터베이스에서 44편의 문헌을 선정하여 이 분야의 현황을 매핑한다. 그 결과 한국의 예술 기반 의학교육이 서사의학과 성찰적 글쓰기에 집중되어 있고, 보고된 교육적 성과는 대체로 자기보고식 설문이나 에세이에 의존하는 Kirkpatrick 2수준의 평가에 머물러 있음을 보여준다. 무엇보다 현재의 교육과정 운영이 짧은 노출 수준의 만남에 그쳐, 예술이 길러낼 수 있는 관계적·서사적·성찰적 역량을 충분히 깊이 다루지 못하고 있다는 점을 진단한다. 저자들은 이 한계의 해법을 대규모 무작위 대조연구의 축적에서 찾지 않는다. 그러한 설계가 이 분야를 진전시킬 현실적이거나 주된 경로가 되기 어렵기 때문이다. 오히려 더 시급한 과제는 예술 기반 학습을 보조적 선택과목에서 통합 6년제 교육과정의 핵심 구성요소로 재배치하는 일이라고 제언한다. 생의학적 훈련만으로는 길러지지 않는, 그러나 인간의 마주침으로서의 의료에 본래 내재한 이러한 역량을 정규 교육과정 안에서 의도적으로 길러내자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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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왜 문화예술 교육을 진행하면서도 이를 교육과정의 주변부로 밀어내거나 일시적인 인성 함양의 도구로만 취급해 왔을까? Hwang [2]의 “의학교육에서 문학과 예술의 역할에 대한 비판적 재구성: 취약성의 미학과 돌봄의 해석학”은 이 문제의 중심부를 파고든다. 저자는 그동안 의학교육에서 문학과 예술이 주로 ‘공감(empathy)’ 능력을 배양하기 위한 수단으로만 정당화되어 온 방식을 비판적으로 성찰한다. 공감을 기계적인 의사소통 기술이나 평가를 위해 수행해야 할 또 하나의 과제로 표준화할 때, 이는 학습자에게 진정한 경청이 아닌 ‘거짓 공감(fake empathy)’을 학습하게 만드는 부작용을 낳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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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wang [2]은 취약성을 단순히 보호하고 관리해야 할 결핍 상태가 아니라, 임상적 마주침의 자리에서 감각적이고 정동적으로 드러나는 사건으로 재정의한다. 환자의 무거운 침묵, 불안에 떠는 눈빛, 설명 앞에서의 망설임은 의학의 객관적 지식이나 수치로 완전히 포착되지 않는 해석적 잉여로 남는다. 따라서 돌봄은 단순히 정해진 표준절차를 수행하거나 도덕적 감정을 표출하는 일이 아니다. 그것은 취약성의 감응 속에서 이해의 성급한 봉합을 지연시키고, 그 구체적인 상황이 요구하는 의미가 무엇인지 끊임없이 묻고 해석하는 프로네시스(phronesis, 실천적 지혜)의 실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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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가 제시한 일개 의과대학생의 중환자실 평행 차트(parallel chart) 사례는 이러한 해석학적 전환의 순간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학생은 처음에 의식이 없는 환자의 신체를 대할 때, 펜 라이트와 해머를 들고 동공 반사와 바빈스키 반사를 확인하며 배웠던 의학적 지식이 그대로 재현되는 것에 지적 호기심과 성취감을 느꼈다. 새로운 것을 발견한 듯 들떠 동기들에게 그 반응들을 보여주려 했다. 그러나 동기들과 함께 환자의 감겨 있던 눈꺼풀을 들어 올린 순간, 닫혀 있던 눈꺼풀 사이로 환자의 슬픈 눈빛이 학생의 마음에 깊이 들어와 남았다. 그 눈빛은 학생에게 말없이 “그만해”라고 외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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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순간, 학생이 머물던 생의학적 앎의 세계는 균열을 일으킨다. 검사 대상이었던 신체는 고통받는 이웃의 ‘얼굴’이 되었고, 학생은 자신이 환자를 ‘나와 그것’의 관계로 도구화했음을 깨닫는다. 다음 날 회진에서 발견한 소견을 교수 앞에서 자신 있게 보고하는 즐거움은 사라지고, 환자 곁에 서서 전날의 행동을 말하는 것조차 고통스러운 무거운 책임감으로 돌아온다. Hwang [2]은 이 평행 차트를 통해 문학과 예술의 가치가 단순히 ‘공감의 성취’를 자랑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지식과 경험의 어긋남 앞에서 발생하는 망설임과 고통을 정직하게 기록하고 그 의미를 해석해 나가는 장을 제공하는 데 있음을 역설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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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wang [2]이 인용한 이 장면은, 예술이 오래전부터 ‘낯설게 하기’라 불러 온 작용과 다르지 않다. Shklovsky [3]는 예술의 기능이 익숙함에 닳아 버린 지각을 깨워 사물을 처음처럼 보게 하는 데 있다고 보았고, Brecht [4]는 손쉬운 감정이입을 일부러 끊어 관객을 다시 보게 하는 소외효과(verfremdung)를 무대에 들였다. 동공 반사와 바빈스키 반사를 확인하던 학생의 시선은 가장 익숙한 의학적 봄이었다. 그 익숙한 봄이 침묵하는 환자의 ‘그만해’ 앞에서 일순 낯설어진다. 학생이 그 눈빛을 왜, 어떻게 읽게 되었는지는 현상학적으로 온전히 설명되지 않는다. 다만 그 낯섦이 학생을 검사라는 차원에서 다른 차원으로, 환자에게로 건너가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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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바로 여기에 예술 기반 교육의 자리가 있다. 그 건너감은 저절로 언어가 되지 않는다. 평행 차트라는 글쓰기, 곧 예술적 양식이 있었기에 학생은 설명되지 않는 그 마주침을 비로소 소통할 수 있었고, 소통한 것을 기록할 수 있었다. 예술적 관점과 접근의 교육이 가르치는 것은 환자를 더 빠르게 이해하는 기술이 아니라, 의학적 발화로는 담기지 않는 그 낯섦의 경험을 정직하게 말하고 적는 능력이다.
이처럼 철학적이고 성찰적인 자극을 의학교육의 현장 속에 구체적으로 구현해 낸 사례도 존재한다. Park [5]의 “의학교육의 인문학적 확장을 위한 예술 기반 교육의 설계 및 운영 사례 연구”는 연세대학교 원주의과대학에서 운영된 ‘의학, 사회, 문화와 예술’ 교과목의 실천과정을 소개한다. 이 프로그램은 방대한 의학 지식의 바다에 매몰되기 쉬운 의예과 1학년 학생들에게 ‘의학적 정체성과 철학,’ ‘매체와 현장을 통한 예술 기반 교육,’ ‘진로 탐색 및 미래 설계’라는 3개의 단계적 모듈을 제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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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교육의 가장 돋보이는 특징은 강의실의 물리적 경계를 허물고 ‘원주시립교향악단’과 ‘뮤지엄 산’ 같은 지역의 수준 높은 문화 인프라를 적극적으로 교육의 장으로 연결했다는 점이다. 학생들은 오케스트라의 선율 속에서 비언어적 경청의 중요성을 배우고, 안도 타다오의 절제된 미술관 공간 속에서 대상을 선입견 없이 세밀하게 바라보는 ‘시각적 문해력(visual literacy)’을 기른다. 정답이 정해져 있지 않은 예술작품을 해석하는 훈련은 곧 임상현장의 복잡성과 불확실성을 견디는 ‘모호함에 대한 인내력’으로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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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이 과정이 순탄했던 것만은 아니다. Park [5]은 의과대학의 엄격한 학사일정과 외부 공연시간을 조율하기 위해 정규수업을 저녁 7시로 변경하는 탄력적 시간제를 도입하고 예산을 확보하는 등, 교수진과 행정팀이 발휘한 행정적 유연성과 헌신적인 노력을 기술한다. 또한 초기에 예술교육을 ‘한가한 시간’으로 치부하던 학생들의 냉소를 극복하기 위해, 의학적 관찰력과 공감능력의 기여도를 보여주는 과학적 근거를 학기 초에 먼저 제시하는 전략도 공유한다. 대학의 설립정신과 지역사회의 자원을 유기적으로 연결한 이 시도는, 학생들이 자신이 속한 공동체에 대한 깊은 유대감을 형성하고 사회적 책무성을 지닌 의료인으로 성장하는 데 정서적 자산이 되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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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특집호의 세 편의 글이 공통으로 가리키는 지향점은 명확하다. 의학교육에서 인문학과 예술은 단순한 지식 전달의 대상이 아니라, 학생의 존재가 변화되는(transformative) 해석의 공간을 열어주는 열쇠다. 그리고 이 공간을 유지하기 위해 우리는 교수자의 역할을 새롭게 정의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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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교수자의 자리를 다시 생각하게 된다. 교수자의 자리는 도덕적 규범이나 올바른 정답을 성급히 제시하며 훈계하는 자리이기보다, 학생이 임상현장의 어긋남과 한계 앞에서 겪는 망설임, 불편함, 그리고 고통을 미숙함의 징후로 여겨 지우려 하지 않고, 그것이 해석과 성찰의 시작점이 될 수 있도록 곁에서 지켜주는 ‘해석의 동반자’의 자리에 가깝다. Levinas [6]의 지적처럼 타자의 얼굴과 마주하며 겪는 윤리적 충격을 정직하게 고백할 수 있도록 이끌고, “네가 그 자리에서 무엇을 보았고, 무엇을 들었으며, 무엇을 더 알고 싶은지” 물어 일상의 의학적인 발화 너머의 메시지를 경청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할 것이다. 그때 비로소 우리의 학생들, 우리 의료의 미래가 되는 제자들은 기술적 수월성을 넘어, 환자의 연약함에 정직하게 감응하고 돌봄의 지혜를 발휘하는 의료인으로 빚어지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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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과대학의 높은 담벼락을 넘어 지역사회의 오케스트라와 미술관으로 번져가는 예술의 울림은, 그리고 중환자실의 클리네에서 학생을 멈춰 세웠던 환자의 슬픈 눈빛은 우리에게 동일한 질문을 던진다. 우리는 의학교육을 통해 어떤 의사를 키워내고 있는가? 세 개의 특집 원고들이 말해주듯 그 실천이 쉽지 않더라도, 우리의 교육이 단순히 술기를 잘 수행하는 기술자(technician)를 양성하는 것이 아니라, 환자의 취약함에 기꺼이 응답할 수 있는 전인적 전문직(professional)으로서 의사를 양성하는 것이 되어야 한다. 이것이 우리의 대답이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침대 곁의 연약함 앞에 멈춰 서서 질문하기를 주저하지 않는 의사, 그 망설임 속에서 돌봄의 언어를 찾아내는 의료인을 길러내는 길에 한국 의학교육의 미래가 걸려 있기 때문이다. 이 열린 초대에 우리 모두가 기쁜 마음으로 동참하기를 소망하며 글을 맺는다.

Conflict of interest

안신기는 의학교육논단의 편집장이지만 이 연구의 심사위원 선정, 평가, 결정 과정에는 관여하지 않았다. 그 외에는 이 연구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기관이나 이해당사자로부터 재정적, 인적 자원을 포함한 일체의 지원을 받은 바 없으며, 연구윤리와 관련된 제반 이해상충이 없음을 선언한다.

Authors’ contribution

안신기: 전반적인 논문 작성 활동 수행

References

1. Huh JS, An S. Arts-based medical education in South Korean medical schools: a descriptive review. Korean Med Educ Rev. 2026;28(2):92-105. https://doi.org/10.17496/kmer.26.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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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Hwang IK. Reconceptualizing the role of literature and the arts in medical education through vulnerability and care. Korean Med Educ Rev. 2026;28(2):106-17. https://doi.org/10.17496/kmer.26.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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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Shklovsky V. Art as technique. In: Lemon LT, Reis MJ, editors and translators. Russian formalist criticism: four essays. Lincoln (NE): University of Nebraska Press; 1965. p. 16-30.
4. Brecht B. Brecht on theatre: the development of an aesthetic. In: Willett J, editor and translator. New York: Hill and Wang; 1964.
5. Park YC. The design and implementation of arts-based education for the humanistic expansion of medical education: a case study focusing on the “Medicine, Society, Culture and the Arts” course at a medical school. Korean Med Educ Rev. 2026;28(2):118-22. https://doi.org/10.17496/kmer.26.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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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Levinas E. Totality and infinity: an essay on exteriority. In: Lingis A, translator. Pittsburgh (PA): Duquesne University Press; 19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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