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동에서 전화가 왔다. 백혈병으로 치료 중인 아이의 통증이 잘 조절되지 않아 소아완화의료팀의 도움을 요청한다는 연락이었다. 진통제를 단계적으로 올리고 있지만 별다른 효과가 없고, 아이는 다리가 너무 아프다며 비명을 지르고 울고 있다고 하였다.
9년 전, 아이는 생식세포종으로 항암치료를 받았고, 힘든 치료를 잘 견뎌낸 뒤 학교와 친구들, 평범한 일상으로 돌아갔다. 모두 지나간 일이라고 생각했지만, 이전 치료의 흔적이 이차암으로 돌아왔다. 급성 골수성 백혈병이었다. 다시 찾아온 병은 항암치료에 쉽게 물러서지 않았고, 치료 중에 백혈병 세포는 이내 다시 늘어나기 시작했다.
길고 험난해질 수 있는 아이의 투병과정에 동행하기 위해 소아완화의료팀의 의사, 간호사, 사회복지사, 미술치료사가 함께 아이와 가족을 만나기 시작했고, 소아완화의료 전담 의사인 나는 아이의 통증과 증상을 살피고, 치료과정을 잘 이해하도록 돕고, 위중한 의사결정에 함께하기 위해 아이와 가족을 만나고 있었다.
발걸음을 재촉해 병실 문을 열고 들어섰을 때, 아이는 두 다리를 양팔로 끌어안고 온 몸에 힘을 주며 신음하고 있었다. 나는 의료진들과 함께 마약성 진통제인 주사용 morphine을 비롯하여 보조 진통제도 함께 주면서 통증이 잦아들기를 기대했으나 아이는 모든 약이 아무 소용없다고 울며 두 다리를 움켜쥔 손을 풀지 못했다. 어제 오늘 사이, 백혈병 세포가 다시 증가했기에 주치의는 급히 새로운 항암제를 처방하여 치료를 이어갔지만 아직 몇 시간이 채 지나지 않아 당장 효과를 기대할 수는 없는 상황이었고, 아이의 침상을 지키며 약물을 증량하고 반복투여해 보았지만 아이의 고통은 좀처럼 줄어들지 않았다. 일반적인 상황을 고려했을 때 충분한 정도의 진통제가 투여되었음에도 아이가 전혀 진정되지 않자, 약물 외에 우리가 더 해 줄 수 있는 것을 찾던 나는 아이 곁에 서서 아이의 등을 천천히 쓸어내리며 말하기 시작했다.
“네가 지금 얼마나 아픈지 선생님들이 다 알지 못하고 해결해 주지 못해서 미안해. 지금 이 통증은 백혈병 세포가 골수를 채우면서 그 안의 압력이 올라가고, 그게 뼈를 감싸는 막을 자극해서 생기는 거야. 그래서 그 백혈병 세포를 없애려고 항암제를 쓰기 시작했어. 시간이 얼마나 걸릴지는 선생님도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이 통증은 꼭 좋아질 거야. 그때까지 선생님들이 진통제 조절 더 해 보고 같이 있을게.”
아이의 긴장과 떨림이 다소 잦아들기에 나는 조심스럽게 말을 이어 갔다.
아이는 내 한쪽 팔을 자기 가슴 앞으로 끌어안고 꼭 붙잡았다. 그리고 쓸어내리는 내 손길에 맞추어 천천히 숨을 들이쉬고 내쉬기 시작했다. 아이는 점차 진정되기 시작했고 두 다리를 움켜쥐고 있던 팔의 힘이 서서히 풀리기 시작했다. 어느 정도 진정이 되자 아이가 말했다.
“어젯밤에 많이 아팠어요. 선생님들이 계속 봐 주시고 진통제도 주셨지만, 저는 아직 통증이 나아지지 않았는데, 선생님들이 다른 아픈 친구들도 돌보러 가시고 나면 밤에는 혼자 남는 것 같았어요. 저는 아직 안 좋아졌는데 혼자 견뎌야 해서 너무 무섭고 힘들었어요. 오늘도 어제 같은 통증이 또 올라온다고 생각하니 밤에 또 혼자 견뎌야 할까 봐… 너무 무서웠어요.”
국제통증연구학회(International Association for the Study of Pain)는 통증을 “실제적이거나 잠재적인 조직 손상과 관련되거나 그와 유사한 불쾌한 감각적·정서적 경험”이라고 정의하였다[
1]. 이 정의에서 중요한 것은 통증이 단순한 감각이 아니라 정서적 경험이기도 하다는 점이다. 또한 통증은 실제 조직 손상이 있을 때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며, 감각신경의 활동만으로 한 사람이 겪는 통증을 온전히 설명할 수도 없다. 통각수용(nociception)은 통증을 일으키는 중요한 생물학적 과정이지만 통각수용만이 통증은 아니다. 조직 손상에서 시작된 신호는 그 사람의 통증 경험, 기억, 두려움, 관계와 만나 해석되고 표현된다.
완화의료는 오래전부터 이 지점을 돌봄의 중심에 두어 왔다. Saunders [
2]는 말기 환자들을 돌보면서 환자가 호소하는 고통이 몸에만 머물지 않으며, 마음의 고통, 가족과의 관계, 경제적 어려움, 삶의 근원적 의미와 깊이 연관되어 있다고 하였다. 그는 이러한 고통을 total pain, 곧 총체적 고통이라고 불렀으며 진정한 고통의 완화는 신체적인 통증을 다루는 것 이상의 전인적 돌봄을 통해 이루어질 수 있다고 설명하였다[
2].
나는 소아완화의료 임상현장에서 아이들의 통증이 이들의 몸 안에만 머물지 않는다는 것을 자주 체감한다. 아이들은 자신의 통증을 말로 충분히 설명하기 어렵고, 이해되지 않는 통증을 자신의 잘못에 대한 벌처럼 받아들이기도 한다. 부모가 걱정할까 봐 아프다는 말을 숨기기도 하고, 예측할 수 없이 다시 찾아올 통증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더 격하게 울거나 매달리기도 한다. 그러나 통증이 기억과 두려움, 관계와 상황 속에서 더 커지거나 달라지는 것은 아이들에게만 국한된 일은 아니다. 통증은 단순히 손상된 조직에서 올라오는 신호가 아니라, 그 신호를 한 사람이 자기 몸과 마음, 경험과 관계 안에서 받아들이고 해석하는 과정이기도 하기 때문에 같은 통증이라도 그것이 왜 생겼는지 알 때와 알지 못할 때, 곁에 누군가 있다고 느낄 때와 혼자 견뎌야 한다고 느낄 때, 다시 좋아질 수 있다고 믿을 때와 끝없이 지속될 것처럼 느낄 때 전혀 다르게 경험됨을 흔히 보게 된다.
그럼에도 진료현장에서 통증은 종종 숫자로만 남는다. 바쁜 업무 가운데 의료진들이 의무적으로 통증 점수를 묻고 기록에 남기는 경우는 드물지 않다. 통증 점수는 환자의 고통을 드러내는 중요한 지표이고, 의료진이 통증을 놓치지 않기 위한 최소한의 장치이다. 그러나 숫자는 출발점이지 도착점이 아니다. 통증 점수는 환자가 겪는 고통을 이해하기 위한 단서일 수 있지만, 그 사람이 그 통증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는지, 무엇을 두려워하는지, 어떤 관계와 상황 속에서 그 통증을 견디고 있는지까지 말해 주지는 않는다. 때로는 아니 생각보다 자주, 그 숫자 뒤에, 조절되지 않는 통증의 감추어진 단서가 있다.
스위스의 가정의학과 의사로 인격 의학의 창시자인 폴 트루니에(Paul Tournier)는 ‘인격 의학’(Medicine of the Person)에서 의사의 역할을 두 가지 과제(이중 과제)로 설명하였다. 하나는 질병의 원인을 규명하고, 최선의 의학 지식과 기술을 바탕으로 질병을 진단하고 치료하는 과학적·기술적 과제, 곧 질병을 치료하는 일(curing the disease)이다. 그러나 그는 의사에게는 질병 이면에 있는 환자의 두려움과 고독, 죄책감과 같은 내면의 고통을 이해하고, 환자가 한 사람의 인격체로서 자신의 병을 받아들이며 그 과정을 살아갈 수 있도록 돌보는 또 하나의 과제(healing the person)가 함께 주어진다고 하였다[
3]. 그는 의사가 ‘과학자’인 동시에 ‘한 사람’으로서 환자와 인격적 관계 안으로 들어설 수 있어야 한다고 보았으며, 그렇기에 ‘인격 의학’이란, 질병이라는 ‘사례’와 그 질병을 앓는 ‘인격’ 모두를 포함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4]. 그는 또한 의사가 병리에 대해서는 환자보다 더 많이 알지만, 환자는 자신의 질병을 살아내는 경험에 대해서만큼은 의사보다 더 많이 안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말했다[
5].
이 말은 환자의 통증과 더불어 다양한 측면의 고통을 마주하는 완화의료 의사인 내게 자주, 절실하게 다가온다. 아주 많은 경우에, 나와 완화의료팀 동료들은 우리의 지식과 경험으로는 도저히 상상할 수도 짐작할 수도 없는 환자와 가족의 고통 앞에서 아무 것도 할 수 없어 한없이 작아지는 것을 경험한다. 이는 비단 신체적인 고통, 통증에 국한되지 않는다. 하지만 우리가 이들의 복잡하고 깊은 고통들을 진단하고 해결해 주지 못한다 할지라도, 동료들과 함께 할 수 있는 최선의 치료와 더불어 이들과 인격적인 만남을 이어가며 이들의 질병 여정에 동반자가 될 때 우리는 그들의 고통이 완화되는 기적을 자주 경험하곤 한다.
그날 이후 아이는 항암치료를 이어 갔고, 조혈모세포 이식도 받았다. 그러나 치료는 쉽게 끝나지 않았다. 얼마 전에는 폐렴이 악화되어 중환자실 치료까지 받아야 했다. 힘든 중환자실 치료를 마치고 병실로 나온 아이는 아직 기력이 채 회복되지 못해 작은 목소리로 속삭이듯 이야기한다. 자주 들러 달라고. 다녀가시면 마음이 안정된다고.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어떤 대화의 끝이었는지 기억은 나지 않지만, 아이가 핸드폰을 열어 자기가 그린 그림이라며 그림을 보여준다. 소아암 그림 공모전에서 상을 받았다며 펼쳐 보인 그림에는 항암치료 중인 크고 작은 아이들이 환히 웃고 있다(
Figure 1). 그리고 그림을 그리는 아이의 손은 빨간 크레용을 힘껏 잡고 그림 속 보랏빛 암세포 덩어리를 공격하며 지워내고 있었다. 그것은 마치, 오늘도 여전히 끝나지 않은 고통의 시간을 걸어가면서도, 자신뿐 아니라 함께 치료받는 이 모든 아이들의 회복과 행복을 기원하는 고귀하고 간절한 기도문 같았다.
Von Baeyer [
6]는 “통증은 체온계로 체온을 재는 것처럼 측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특별한 시선을 가질 때만 측정될 수 있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우리 의사들은 흔히 질병과 질환을 대하면서 증거와 근거에만 사로잡힐 때가 많다. 하지만 우리가 아는 것이 전부가 아님을 나는 아이들과 가족들을 통해서 배운다. 폴 트루니에의 말처럼, 의사가 자신의 전문 분야에서 질병의 진단과 치료와 예후에 대하여 많은 것을 알지 모르겠지만, 질병을 살아내는 경험에 있어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을 살아가는 삶의 깊이에 있어서는 어린 아이라 할지라도 우리보다 위대한 스승일 때가 많음을 고백한다. 그래서 나는, 환자는 단지 우리가 베푸는 의술을 받는 대상이 아니라, 우리로 하여금 그들이 고통 가운데 체득한 귀하고 진실된 것들을 배울 수 있도록 하는 존재라는 것을 잊지 않으려고 한다. 그리고 ‘사례’로만이 아닌 ‘인격’으로 이들을 바라보는 의사의 이중 과제가 우리를 더욱 성숙한 의료인으로 성장하도록 돕는다는 값진 경험을 우리 학생들도 하게 되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