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량바탕의학교육 시대의 의학교육의 개인화
Personalizing Medical Education in the Era of Competency-Based Medical Educa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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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 의학교육은 중요한 전환점에 서 있다. 지난 한 세기 동안 의학교육은 플렉스너 보고서(Flexner report)의 유산 아래 ‘표준화’라는 기치 아래 발전해 왔다. 이는 모든 학생이 의사로서 기대되는 필수 역량을 달성하도록 동일한 지식 기반과 임상실습을 거쳐, 일정한 수준의 역량을 갖추도록 보장하는 역량바탕의학교육(competency-based medical education, CBME)이라는 표준으로 자리 잡았다. 이는 획일화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각 국가와 지역사회의 의료필요에 부응하는 역량을 정의하고, 그 역량을 구비한 전문가를 양성하되 개인의 특성과 진로를 고려한 맞춤형 의학교육을 구현하려는 것이 그 내용이다. 현대의 의학 지식은 개인이 따라잡기 어려울 정도로 폭발적으로 증가하고 있으며, 의사들의 진로 또한 전통적인 임상진료를 넘어 연구, 행정, 산업, 글로벌 보건 등 다변화되고 있기 때문에, 의학교육자들은 이러한 시대적 변화에 부응하기 위한 “의학교육의 개인화”라는 과제의 중요성을 다시 확인하게 되었다. 이번 특집호에 게재된 네 편의 다양한 논의는 이러한 도전에 대한 의학교육계의 고민과 그 해결의 시사점을 보여준다.
Yeh [1]는 향후 의학교육계의 주요 과제와 나아갈 방향을 “의학교육의 개인화(personalizing medical education)”라는 과제로 전망했다. 이제 의학교육은 ‘어떻게 모든 학생을 동일한 기준으로 만들 것인가’라는 질문에서 ‘어떻게 모든 학생이 필수 역량을 달성하면서도 각자의 잠재력을 개발할 수 있도록 도울 것인가’라는 질문으로 이동하고 있음을 보이는 것이다. 의학교육의 개인화는 CBME이라는 기존의 패러다임을 폐기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본질을 심화시키는 과정이라 할 수 있다. 왜냐하면 CBME의 핵심 철학이 ‘고정된 교육기간’이 아닌 ‘고정된 역량 기대치’이며, 이 기대치를 충족하는 데 걸리는 시간과 과정은 학습자마다 다를 수 있음을 전제하기 때문이다. 학습자의 차이를 인정하고 수용하는 것은 표준화된 획일적 교육과정의 한계를 드러내며, 모든 학생이 각기 다른 속도와 방식으로 역량을 달성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유연한 교육전략을 요구한다. 그 필요와 철학을 알지만 현실적으로 구현하지 못하는 의학교육자들의 고뇌가 만나는 지점이다. 이러한 교육전략과 관련해서 비슷한 용어들이 사용되고 있어 정리가 필요하다.
Jeong [2]은 이에 대해서 개별화(individualized), 차별화(differentiated), 개인맞춤형(personalized) 학습으로 그 개념을 구분하여 제시한다. 개별화와 차별화 학습은 정해진 공통의 학습목표를 모든 학생이 달성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교수자 주도적 교육전략이다. 개별화 학습은 학습목표를 성취하기 위해서 학생 개인의 학습속도(learning pace)에 따라 교육과정을 유연화하는 것을 의미하며, 차별화 학습이란 학생들의 특성와 선호에 따라 학습방법을 다양화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모든 학생이 유리한 학습조건만 제공된다면 무엇이든 배울 수 있다는 ‘완전학습(mastery learning)’ 모델에 뿌리를 둔 것으로, 고정된 학습목표에 도달하는 경로를 학생의 특성에 맞게 조절하자는 것이다. 이에 비해 개인맞춤형 학습은 학습목표 자체가 학생의 특성에 따라 달라질 수 있음을 의미한다. 이러한 개념적 구분은 단순한 학문적 논의가 아니라, 실제 교육과정 설계에 중요한 시사점을 제공한다. 역량바탕의학교육이 추구하는 표준화된 성과 달성과 개인맞춤형 교육이 추구하는 다양성은 언뜻 상충되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
그러나 Nguyen 등[3]이 소개한 베트남 VinUniversity의 내과 전공의 교육과정의 ’개별화된 학습계획(individualized learning plan, ILP)’의 사례는 이 둘이 양립 가능함을 보여준다. 내과 전공의 교육과정에서는 Accreditation Council for Graduate Medical Education-International (ACGME-I) 기준에 따른 핵심 역량을 모든 전공의가 달성하도록 목표하고 있다. ACGME-I 인증프로그램에서 임상역량위원회(Clinical Competency Committee, CCC)는 다면평가를 통해 특정 전공의의 역량(예: 구두 증례 발표)이 공통 기준(milestone)에 미달됨이 확인되면, ILP는 해당 역량을 보완하기 위한 집중 멘토링이나 추가 실습 같은 ‘개별화된’ 처방을 내린다. 이는 모든 학습자가 정해진 역량 목표에 도달하도록 학습속도와 방법을 조절해주는 전형적인 ‘개별화’의 적용이다. 이처럼 ILP를 통해 각자의 학습속도와 관심 분야를 반영한 맞춤형 교육을 제공하고 있다. ILP는 역량 미달을 보완하는 데 그치지 않고, 특정 전공의가 예를 들어 심장학 펠로우십이라는 자신의 진로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저널 클럽을 주도하거나 관련 술기를 심화 학습하는 ‘풍부화(enrichment)’의 도구로도 활용되어 개인맞춤형 교육을 도입하고 있다.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의예과의 세 가지 맞춤형 교육과정은 개인맞춤형 교육과정 적용의 사례라 할 수 있다[4]. 의예과 Curriculum Path Model (CPM)은 학생들이 경영, 수학ㆍ통계, 문학ㆍ철학 등 다양한 분야를 부전공 수준으로 심화 학습할 수 있게 함으로써, 의학 외 분야의 전문성을 갖춘 의사 양성의 가능성을 보여준다. 국제보건의료 교육과정은 필수와 선택을 조합하여 학생들이 자신의 관심도에 따라 단계적으로 깊이 있는 학습을 할 수 있도록 설계되었고, 지속연구과정은 의예과부터 본과 4학년까지 연속적인 연구경험을 제공함으로써, 의사과학자 양성이라는 구체적인 진로목표를 가진 학생들에게 맞춤형 교육경로를 제공한다. Yeh [1]와 Jeong [2]은 MOOC, Coursera, Khan Academy와 같은 대규모 온라인 플랫폼과 AMBOSS, Lecturio, Osmosis 같은 의학교육 특화 플랫폼의 등장이 의학교육에 미치는 영향을 지적한다. 이제 학생들은 소속 대학의 물리적, 지리적 경계를 넘어 전 세계의 우수한 교육 자원에 접근할 수 있다. 이러한 변화는 단순히 학습자원이 풍부해졌다는 의미를 넘어, 의과대학이 제공해야 할 교육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다시 생각하게 한다. 서울대학교의 CPM 사례에서 볼 수 있듯이, 학생들이 타 단과대학의 과목을 수강하거나, 지속연구과정에서 여러 교수진과 연결되어 연구를 수행하는 것은 대학은 더 이상 모든 지식을 직접 전달하는 곳이 아니라, 학생들이 자신의 학습경로를 설계하고 실행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플랫폼의 역할을 해야 함을 뜻한다. 나아가 양질의 의학교육을 위해서 의과대학들이 교육자원을 공유하는 디지털 플랫폼을 구축하는 것도 앞으로 적극적으로 고려해야 할 일이다. 이처럼 개별화된 의학교육과정 그리고 개인맞춤형 의학교육과정을 도입하는 노력을 의학교육의 개인화(personalizing medical education)라고 할 수 있다. 의학교육의 개인화는 막연히 추구해야하는 미래가 아니라, 이미 의료에 도입되어 정착되어 가고 있는 정밀의료(precision medicine)를 고려할 때, 데이터 기반으로 정교하게 구현하는 ‘정밀의학교육(precision medical education, PME)’으로 구현되어야 할 것이다. 정밀의료의 개념이 의학교육에 적용되면서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대두되고 있다. 정밀의학이 개인의 유전체, 환경, 생활습관 데이터를 기반으로 최적화된 치료를 제공하듯이, PME는 학습자의 인지패턴, 학습속도, 강점과 약점에 대한 데이터를 수집ㆍ분석하여 최적화된 교육경로를 제시한다. VinUniversity의 마일스톤 평가시스템과 임상역량위원회의 다면적 피드백 시스템은 이러한 정밀교육의 초기 모델을 보여준다. 6개월마다 실시되는 종합적 평가를 통해 각 레지던트의 역량 달성도를 세밀하게 추적하고, 이를 바탕으로 개별화된 학습목표와 전략을 수립하기 때문이다. 향후 인공지능과 학습분석(learning analytics) 기술의 발전은 PME를 더욱 정교하게 만들 것이다. 학생의 학습패턴, 평가결과, 임상 수행 데이터를 실시간으로 분석하여 개인별 최적 학습경로를 제시하고, 학습의 어려움을 예측하여 선제적 지원을 제공하는 것이 가능해질 것이다. PME의 실행을 위해서는 학습 데이터의 수집과 분석을 위한 기술적 인프라가 필요하고, 데이터 프라이버시와 윤리적 문제를 해결해야 하며, 교수진이 데이터 기반 교육방법을 이해하고 활용할 수 있도록 역량을 개발해야 한다.
한편, 개인화된 의학교육의 실행에는 여러 도전이 따른다. VinUniversity의 경험은 이러한 도전을 구체적으로 보여준다. 교수진의 부족, ILP 개발과 후속조치를 위한 시간 부족, 종단적 학습활동의 부재 등이 주요 과제로 지적되었다. 이에 대해 VinUniversity는 펜실베이니아 대학과의 협력을 통한 체계적인 교수개발 프로그램, 전공의 프로그램 졸업생을 미래 교수진으로 양성하는 장기적 접근 등의 해결책을 제시하고 있다.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역시 참여 교수에 대한 높은 교육점수 부여, 과목 운영비 지원, 공통 강의와 팀티칭을 통한 교수 부담 경감, 전담 직원 배치 등의 제도적 지원을 통해 지속 가능성을 확보하려 하고 있다. 모든 저자들이 지적하고 있듯이 의학교육의 개인화는 단순히 교육과정의 변화만으로는 불가능하며, 제도적ㆍ행정적 지원과 교수개발이 필수적이다.
의학교육의 개인화에 대한 논의는 향후 의학교육의 발전방향에 대해 다음의 시사점을 가진다 할 수 있다. 첫째, 역량바탕교육의 틀 안에서 데이터 기반 개별화가 가능해지는 것이다. 모든 학생이 필수 역량을 달성하도록 하되, 각 학생의 학습 데이터를 기반으로 최적화된 경로와 방법을 제시할 수 있을 것이다. 둘째, 학생들의 가치관, 선호, 진로목표뿐만 아니라 학습 특성과 인지패턴을 고려한 정밀한 교육설계가 도입되는 것이다. 이를 위해 지속적인 평가와 피드백 시스템을 구축하고, 이를 통해 수집된 데이터를 교육 개선에 활용하는 구조가 필요하다. 셋째, 대학의 경계를 넘어서는 학습자원과 데이터를 통합적으로 관리하고 활용할 수 있는 시스템의 구축이다. 학생들이 다양한 플랫폼에서 학습하는 경험을 포트폴리오로 통합하고, 이를 종합적으로 평가할 수 있는 체계가 마련될 것이다. 역량바탕교육이 제공하는 명확한 성과 기준, 의학교육의 개인화가 제공하는 유연성, 그리고 PME가 제공하는 데이터 기반 최적화를 결합하면, 우리는 학생의 잠재력을 최대한 실현하는 의학교육시스템을 구축할 수 있을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기술적 인프라의 구축, 교수역량의 개발, 그리고 교육 패러다임이 전환되는 큰 변화가 있어야겠지만, 이번 특집호의 논의가 그 방향을 가늠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Notes
Conflict of interest
안신기는 의학교육논단의 편집장이지만 이 연구의 심사위원 선정, 평가, 결정 과정에는 관여하지 않았다. 그 외에는 이 연구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기관이나 이해당사자로부터 재정적, 인적 자원을 포함한 일체의 지원을 받은 바 없으며, 연구윤리와 관련된 제반 이해상충이 없음을 선언한다.
Authors’ contribution
안신기: 전반적인 논문 작성 활동 수행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