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과대학 정원을 확대하겠다는 정부의 방침이 알려지면서 긴장이 고조되고 있다. 정부는 지속적으로 불거지고 있는 필수의료 관련 인력 부족 및 수도권과 지방의 의료인력 불균형 분포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의사의 수를 획기적으로 늘려야 한다고 발표했다[
1]. 이에 대해 의료계는 정부 및 여당에게 불리하게 전개되고 있는 최근 정국을 타개하기 위한 정치적인 결정으로 해석하고 있으며, 필수의료에 지원하지 않도록 만드는 의료환경 및 제도를 개선하는 것이 선행되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2]. 대한의사협회는 긴급 의료계 대표자 대회를 열고 정부 정책이 의료계와의 논의 없이 강행되면 강력한 집단행동에 나설 것을 예고했다. 전격적으로 진행할 것처럼 보였던 의대 정원 증원 확대는 의료계의 거센 반발 앞에서 일단 숨고르기에 들어간 형국이다. 그야말로 폭풍전야의 의료계이다. 1,000명에 가까운 의대 정원의 대폭적인 증원은 입시 전문가에 따르면 명문대학 하나가 신설된 것과 같은 것으로 높은 의대 지원율을 고려할 때 우수인재들이 다른 학문 분야에 지원하는 것이 감소할 것이라 예상하였다[
3]. 이 또한 쉽지 않은 일이다.
정부의 공공의대 설립과 의대 정원 증원의 명분이 되기도 한 coronavirus disease 2019 (COVID-19)의 대유행은 문자 그대로 세계적인 영향을 미쳤다. COVID-19 이전의 세계는 국가 간 경계를 넘어서는 글로벌가치사슬(global value-chain)로 단단히 연결된 초연결 시대를 구축해 있었고, 이러한 삶의 환경은 특정 지역에서 발생한 감염병이 삽시간에 세계적으로 확산되는 배경이 되었다. COVID-19로 인한 피해가 기존의 사회적인 불평등으로 인해 더 격차가 벌어지는 syndemic 현상이 확인되어 인간의 안녕과 건강에 미치는 사회적 결정요인들에 대한 실증적인 경험을 하게 되었다[
4]. 지구온난화로 인한 인수공통감염증의 위험성의 증대와 새로운 전염병 대두의 가능성은 의학교육의 내용과 체계에 대해 심각한 재고가 필요함을 환기해 주었다.
유래를 발견하기 어려운 우리 사회의 저출산-고령화와 그로 인한 인구양상의 변화, 질병양상의 변화와 정부의 의료보장확대 방침 등은 의료보험재정의 압박으로 이어지고 있다. 이에 대응하기 위한 의료서비스의 지불체계의 변화에 대한 압박이 점증하고 있다. 의료서비스를 권리로 이해하는 인식의 변화는 수술실 CCTV 설치 입법화와 그 시행으로 상징된다 할 수 있는데, 이러한 사회적 결정이 의료진들에 대한 적절한 보호와 더불어 진행되지 않았기 때문에 의료계의 원성이 높다. 의료가 이루어지는 맥락으로서 사회가 크고 빠르게 변화하고 있는 것이다.
의료는 또한 어떠한가? 과학으로서 의학은 매우 빠르게 발전하고 있고, 의료는 환자 중심의 팀바탕 접근이 표준모델이 되었다. 다른 전문분야의 의사들만이 아니라 의료기관 내의 타직종의 전문가들과의 협력 없이는 불가능해졌다. 전문직 간 협업을 이루어낼 수 있는 역량이 필수적인 것이 된 것이다. 기관에서의 일과 자신의 삶, 소위 일과 삶의 균형을 중시하며 삶에 대한 다른 이해를 가진 새로운 세대가 의료 인력의 핵심으로 대두되고 있으므로 의료계 내외의 문화적 변화는 실로 상전벽해라 할 수 있다.
우리가 양성하고 있는 다음 세대의 의료인들은 전술한 바와 같이 변화의 격랑 가운데 전문가로서 활동해야 한다. 피할 수 없는 충돌들이 기다리고 있는 현실에서 의학교육자들은 과연 이들에게 어떤 역량을 갖추도록 해야 하는가를 심각하게 물어야 한다. 학생들이 의료시스템 전체 혹은 건강의 사회적인 결정요소 등을 고려해서 판단하고 행동할 수 있는 능력을 저절로 획득하리라고 기대하는 것은 무책임한 결정이라고 할 수 있다. 교육과정이 교육목적을 성취하기 위해서 의도된 계획과 그 실천이라고 볼 때, 생의학적인 지식과 술기 이외에도 사회 속에서 실제로 학생들이 의료인으로서 실천할 의료에 있어서 반드시 필요한 역량들을 교육하는 과정은 체계적으로 설계되어야 한다.
미국 의학교육에 의료시스템과학(health systems science)이 발흥한 것은 소위 ‘Obama Care’라고 하는 적정(또는 책임)의료에 관한 법률(Affordable Care Act, ACA)의 채택과도 연관지을 수 있다. 미국은 지구상의 모든 국가 중 가장 많은 의료비를 지출하지만 포괄적 의료보장을 이루지 못했다. 발전한 의과학 및 의료수준에 비해서 효율적인 의료보장체계가 구축되지 못했다(이러한 현실은 COVID-19를 겪으면서 단적으로 증명되기도 하였다)는 현실이 반영된 결정이다. ACA에 따른 적정의료기구들(Affordable Care Organizations)이 제공하는 의료모델은 의료시스템과학에서 다루는 내용들을 실천하려는 노력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변혁들을 의학교육에 체계적으로 담아내려는 반성적인 노력이 의료시스템과학 교육이다. “성공적인 의료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해서는 의료에 영향을 미치는 제반 요소를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며[
5], 제반 요소들을 이해함에 있어서 필요한 시스템사고를 체계적으로 교육하려는 것이다. 미국의사협회가 제안한 의료시스템과학 개념 틀은 핵심 영역, 기반역량 영역, 그리고 연결 영역으로 구성되어 있고 3개 영역은 총 12개의 구성요소로 구축되어 있다. Yang 등[
5]은 이 개념 틀이 한국에도 적용될 수 있으나 각 영역을 이루는 구성요소들이 의료가 이루어지는 맥락으로서 미국이라는 사회와 시스템을 배경으로 하고 있으므로, 한국에 적용하기 위해서는 국내 의료시스템의 특성을 고려한 수정이 필요하다고 밝혔다.
2013년에 제안된 의료시스템과학의 연원이 길지 않으므로 교육과정의 설계는 여전히 모색의 단계라 할 수 있다. 국내 의과대학의 교육현황도 다르지 않다. 의료시스템과학 교육과정을 의과대학 교육과정 전체를 관통하는 독립된 과정으로서 실행하고 있는 국내 대학은 아직 없으며, 이 과정을 구성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따라서 현재 실행되고 있는 교육과정 가운데 의료시스템과학 교육과정을 부분적으로 적용하는 교수설계를 시도해볼 것을 현실적인 안으로 제안하고 있다[
6]. 교육의 요구도에 대한 현황을 볼 때 핵심 영역에 대한 교육요구도는 높은 수준이었으나 의료시스템 개선과 질 관리 및 환자안전 등은 상대적으로 낮았으며, 기반역량 및 연결 영역에서 의료를 다양한 차원에서 보는 기술과 시스템사고와 관련한 교육 요구도가 낮은 것으로 드러났다[
6]. 한편, 의료인문학교육경험에서 확인된 것이지만, 강의에 의존하는 전통적 방식의 의료인문학 교육은 의료인문학적 역량을 획득함에 효과적이지 못하다. 마찬가지로 의료시스템과학 교육과정이 잘 설계되지 않으면 기초 및 임상의학 교육과정에 밀려 학생들의 관심에서 멀어질 수밖에 없다. 기초 및 임상의학과 관련한 지식과 정보는 그 내용을 빨리 파악하고 이해해서 자기 것으로 수용하는 순응적인(conformistic) 특징을 가지지만, 의료시스템과학과 관련한 지식과 정보는 통합적이고 비판적인 사고와 관심을 요구한다. 따라서 교육과정의 설계에 이러한 요구가 반영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교육과정은 단순한 정보전달이 아니라 사례를 중심으로 임상현장과 교육을 연결하고 의료를 시스템사고에 근거해서 바라볼 수 있는 참여적인 교육과정으로 설계되어야 할 것이다[
7]. 이러한 교육과정의 설계가 쉽지 않기 때문에 현실적으로 임상실습의 상황에서 의료시스템에 대한 사고를 환기할 수 있는 교육적인 질문들이 실제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 방법이 될 수 있음을 제안하고 있다[
8].
한편, 의학교육은 의료인으로서 전문직 정체성을 갖추어 가는 결과를 이루는데, 이 전문직 정체성 형성의 과정은 전문가 집단의 가치, 행동규범 등을 체득하는 해체와 재형성의 과정을 거치게 된다. 인명을 다루는 직업의 특성상 높은 윤리적 규범의 준수와 실천이 기대된다. 졸업 후 수련의 과정에서도 교수가 지도받는 수련의들을 신뢰할 수 있을 때 실제로 술기를 위탁할 수 있기 때문에 이러한 학문과 지도의 특성에서 의학교육은 비판적이라기보다는 순응적인 특성을 가질 수밖에 없다. 더구나 많은 정보를 신속하고 효율적으로 처리하는 역량이 중시되는 의학교육의 현실에서 교수나 학생들이 기존의 체계에 대해서 비판적으로 성찰하고 질문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긴박하게 전개되는 작금의 의료계 내외의 변화를 고려할 때 다음 세대의 의료인들을 양성하는 의학교육에 의료시스템과학이 강조하는 관점은 반드시 그리고 급하게 필요한 것이 사실이다. 다만 안타까운 것은 이러한 필요에 대해서 교육기관과 교육자들이 전략적이고 지속적인 추구를 이루고 있지 못하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교육을 담당해야 하는 교수들 자신이 시스템사고에 익숙한가 그리고 실제 전문가로서 자신의 활동에 시스템사고를 적용하고 있는가는 정직하게 성찰할 과제이다.
이번 호의 의료시스템과학 교육 특집을 위해 의료시스템과학의 필요성과 교육방안에 대한 정책연구과제들을 수행한 연구자들을 집필진으로 초청하였다. 연구자들이 밝힌 바와 같이 그 연구들은 미국의사협회가 제안한 의료시스템과학 개념 틀에 그 근간을 두고 있고 우리 사회의 맥락과 시스템에 대해 충분히 고려하지 못한 제한점이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므로 미국의 의료문화와 시스템, 그리고 교육적인 접근에 근거한 의료시스템과학의 틀을 그대로 한국에 이식하는 것이 과연 정당한가라고 비판하는 것은 타당한 근거를 가진다 할 수 있다[
9]. 의학을 구성했던 기존의 기초의학과 임상의학에 더해서 새로운 기둥으로서 의료시스템과학은 여전히 그 개념이 발전되어 가고 있는 분야이며, 이번 특집에서 다룬 논의들이 의료시스템과학에 대한 비판적 성찰과 구체적인 실천을 이루어 가는 계기가 되기를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