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 론
2019년 11월 8일 서울 프레스센터 국제회의실에서는 ‘한국의학교육평가원’(Korean Institute of Medical Education and Evaluation)이 주최하는 의학교육 평가인증 20주년 기념 심포지엄이 개최되었다. “한국의학교육평가원의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라는 주제로 열린 이날 심포지엄에서는 그동안 한국의학교육평가원이 사용해 온 인증평가기준의 변천사와 졸업 후 수련교육 및 의사 평생교육과정 평가인증 문제, 그리고 미래 한국의학교육평가원의 발전방안 등에 관한 발표가 있었다[1].
결코 길다고 할 수 없는 20년 동안 국내 다른 어느 학문계열에 앞서 한국의학교육평가원이 수행해 온 의과대학 평가인증활동과 이를 통해 이룩한 업적은 높이 평가할 만하다. 특히 2014년 5월 한국의학교육평가원이 교육부 ‘고등교육 프로그램 평가인증 인정기관’에 지정된 일과 2016년 9월 세계의학교육연합회(World Federation for Medical Education, WFME)로부터 전 세계 4번째, 아시아에서는 첫 번째로 국제적인 의과대학 평가인증기관에 선정된 일은 우리나라 의학교육 역사상 가장 획기적인 일 중의 하나라 할 수 있다. 무엇보다 2012년 2월 보건복지부가 “의료법” 일부 개정을 통해 2017년 이후 한국의학교육평가원의 인증을 받지 못한 의과대학 졸업생들은 국가 의사면허시험에 응시할 수 없게 한 결정과, 2016년 6월 교육부가 “고등교육법” 시행령 일부를 개정하여 모든 의과대학의 평가인증을 의무화한 것은 기적 같은 일이다. 의료계가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자율적으로 시작한 의과대학 인정평가사업이 드디어 정부의 법적, 제도적 뒷받침을 받게 된 것이다. 2013년 한국의학교육평가원의 인증평가에서 ‘불인증’을 받고, 이어 2016년 추가적인 평가에서도 불인증을 받은 서남대학교 의과대학이 결국 2018년 2월 폐교하게 된 것이 그 실증적 증거다. 이런 성과는 모두 한국의학교육평가원이 최근에 이루어낸 것들이기는 하지만, 따지고 보면 기존 의과대학들의 교육과정과 교육환경을 개선해야 했던 상황에서, 오히려 1970년대와 80년대에 무려 19개의 의과대학이 정부의 허가를 받아 신설되는 것을 지켜본 의료계가 부실한 의과대학의 난립을 막고 기존 의과대학의 교육수준을 향상시키기 위해 의학교육 평가인증제도 도입에 힘을 모아 노력했던 결과라 할 수 있다.
한국의학교육평가원이 보건복지부의 법인등록을 통해 정식으로 독립법인체가 된 것은 2004년의 일이다. 그러므로 우리나라 의과대학 평가인증제도의 역사는 이를 기준으로 그 이전과 이후로 나누어 논의하는 것이 맞다. 2004년 이후에는 의과대학 평가인증에 관한 모든 활동이 자연스럽게 독립기구인 한국의학교육평가원의 기록으로 잘 정리되어 온 편이지만, 그 이전의 활동에 대해서는 그렇지 못하다. 이때만 해도 의과대학 인정평가 관련 활동은 독립기구가 아닌, 일부 의학교육 관련단체들을 중심으로 한, 일종의 실무위원회(working committee) 차원에서 이루어진 것들이기 때문이다.
물론 그동안 우리나라 의과대학 평가인증제 도입의 배경이나 의학교육계의 초창기 활동에 관한 논문이나 관련 문헌들이 없는 것은 아니다. 특히 한국의학교육평가원이 창립 5주년과 평가인증 도입 10년을 맞아 2009년에 발간한 “의과대학 평가인증 10년사”[2]와 사실상 초창기 우리나라 의과대학 인정평가활동을 주도했던 한국의과대학장협의회, 즉 지금의 ‘한국의과대학·의학전문대학원협회’(Korean Association of Medical Colleges)가 2014년에 발간한 “각성과 도전”이라는 협회 발전사에는 의과대학 평가인증제도 도입 초창기 역사에 대해 비교적 자세히 기술(記述)하고 있기는 하다[3]. 그러나 한국의학교육평가원의 10년사에 담긴 초창기 역사는 주로 한국의학교육평가원의 전신인 ‘한국의과대학인정평가위원회’(Accreditation Board of Medical Education and Evaluation)의 회의록을 정리해서 무슨 일이 언제 있었는지를 연대별로 기록하고 있는 수준이고, 의과대학·의학전문대학원협회의 발전사는 당시 평가인증제도 도입 노력의 주체였던 의과대학장협의회의 활동 내지는 유관단체들과의 관계 차원에서 이를 기록하고 있어서 우리나라 의학교육 평가인증제 도입의 역사적, 현실적 배경이나 초창기 활동을 종합적으로 다루고 있지는 못하다.
이 논문에서는 그동안 발표된 의과대학 평가인증에 관한 주요 논문과 의학교육 관련 기관들에서 발간한 책자들을 바탕으로 한국의학교육평가원의 역사, 특히 한국의학교육평가원이 독립법인이 되던 해이면서 제1주기 의과대학 인정평가사업이 종료되던 2004년 이전의 우리나라 의학교육 평가인증제 도입을 위한 노력들을 정리해 보았다. 특히 1990년대 초부터 이 제도의 도입을 적극 주장했던 당시 한국의과대학장협의회와 한국의학교육학회, 그리고 1998년에 설립된 한국의과대학인정평가위원회의 주요 활동과 그 배경 등에 초점을 맞춰 검토했다. 따라서 이 논문의 내용이 이 시기에 발표된 관련 다른 문헌들과 다소 중복되는 부분이 없지 않지만,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당시의 기록들을 종합적으로 기술하고 해석함으로써 향후 한국의학교육평가원의 역사기록과 발전방안 수립에 하나의 보조 문헌자료를 제공하는 것이 이 논문의 목적이다.
참고로 이 논문에서는 ‘인증평가’ 또는 ‘평가인증’이라는 말과 ‘인정평가’라는 말이 혼재되어 쓰이고 있기도 한데, 이는 교육부가 2009년 1월 1일부터 시행한 “대한민국 고등교육기관의 평가인증 등에 관한 규정”이 발효되기 전까지는 인증을 위한 대학종합평가나 학과평가를 ‘인정평가’라고 했었기 때문이다. 이 논문에서는 인증을 위한 평가나 평가를 통한 인증의 개념에 대해서는 시기와 무관하게 지금 사용하는 ‘인증평가’ 또는 ‘평가인증’으로 표기하되, 초창기 평가기구 명칭이나 실제 평가활동에서 사용했던 고유명사 성격의 ‘인정평가’라는 용어는 그대로 썼음을 밝혀둔다.
한국 의학교육 평가와 평가인증제 도입 논의의 역사적 배경
‘평가’와 ‘평가인증’은 다르다. 평가의 사전적 의미는 ‘사물의 가치나 수준 따위를 따져 보는 것’으로 영어로는 evaluation 또는 assessment에 해당한다. 말 그대로 사물의 가치와 수준이 어느 정도인지 그 현황을 알아보는 일이다. 따라서 어느 의과대학의 교육을 평가한다는 것은 그 대학의 교육과정과 시설, 인력 등 교육환경실태를 좋고 나쁨이나 많고 적음을 따지지 않고 있는 그대로 파악하는 일이다. 이에 비해 평가인증은 “전문가 집단이 특정 프로그램이나 기관에 대하여 상호 동의한 기준(standards)에 합치하거나 도달하고 있는지 여부를 알아보고 그 기관의 프로그램의 적합성 여부를 판단하는 과정”을 말하며[4], 영어로는 evaluation for recognition 또는 evaluation for accreditation에 해당한다. 따라서 의과대학 평가인증이란 의과대학의 교육여건과 교육프로그램이 전문인증기구에서 정하는 기준을 만족시킴으로써 사회가 원하는 의료인을 제대로 양성해내고 있는지 여부를 증명해 주는 일이라고 할 수 있다. 의사를 양성하는 의과대학들이 소위 의학의 ‘사회적 책무성’(social accountability)을 실천하고 있는지를 평가해서 공개하는 방법이다.
우리나라의 경우 의과대학 교육실태 파악 수준의 단순한 평가는 1979년 이후 한국의과대학장협의회, 즉 지금의 한국의과대학·의학전문대학원협회가 발간해 온 “의과대학 교육현황” 책자가 그 대표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이런 교육현황집을 통해 각 대학은 스스로 자기 대학의 교육과정이나 교육환경실태를 파악하고 다른 대학들의 실태와 비교해봄으로써 상대적으로 부족한 점이 무엇인지를 알아 이를 개선하는 노력을 하게 하는 효과가 있는 것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그러나 이것만으로 그 의과대학의 교육수준이 사회적 책무성을 실천하기에 충분한지 여부를 판단할 수는 없다. 그보다는 별도의 독립적이고 자율적인 평가 전문기구에 의해서 해당 의과대학의 교육과정과 교육환경이 이 평가기구에서 정한 평가항목별 기준에 도달하고 있는지를 판단해서 인증 여부를 결정해주는 제도가 필요하다.
사실 우리나라에서 의학교육에 관한 평가나 평가인증 문제를 논의하기 시작한 역사는 그리 길다고 할 수 없다. 현대 서양의학교육의 역사 자체가 길지 않기 때문이다.
현 서울대학교 의과대학의 기원을 1899년 대한의원 부속의학교로 본다면, 1945년 해방 전까지 우리나라에서 서양의학교육을 실시한 곳은 1885년에 설립된 세브란스 의학교와 함께 2개에 불과했다. 그러나 해방 이후 1940년대 후반부에 6개 의과대학이 설립되고, 1950년대 2개, 그리고 60년대에 다시 4개의 의과대학이 설립된다. 이렇게 의과대학의 수가 늘어나면서 1960년대 초에 자연스럽게 전국 의과대학장들의 모임인 ‘학장회의’가 만들어진다. 이후 학장회의는 1971년에 학장들 외에 의학교육 전문가들이 함께 참여하는 ‘한국의학교육협회’로, 그리고 잠시 ‘한국의학교육협의회’라는 이름으로 명칭을 변경하며 운영해 오다가 1984년에 다시 학장들이 중심이 되고 몇 명의 전문위원 교수들이 참여하는 ‘한국의과대학장협의회’로 이름을 바꾸게 된다, 2013년 6월에는 2000년대에 들어서서 만들어진 의학전문대학원들을 포함한 ‘한국의과대학·의학전문대학원협회’로 다시 명칭을 변경하여 지금에 이르고 있다.
의과대학 평가를 포함한 의학교육 전반에 걸친 문제들이 이미 1970년대부터 학장회의나 학장협의회의 의학교육 세미나 등에서 활발하게 논의된 것이 사실이지만, 의학교육 내지 의과대학 평가인증제도 필요성이 절실했던 것은 역시 1970년대와 80년대에 많은 의과대학이 신설되면서 의학교육의 질 문제가 의료계의 주요 관심사가 되면서부터라고 할 수 있다[3]. 그러나 앞서도 잠시 언급했지만 우리나라 의과대학 평가인증제도 도입 노력의 주요 배경을 단순히 신설 의과대학 설립 때문인 것으로 보는 점에 대해서는 추가적인 설명이 필요하다. 의과대학 평가인증이 무분별한 의과대학 신설을 막는 하나의 장치가 되는 것은 사실이지만, 기존 의과대학들의 인증 여부를 판단하는 평가인증기준이 그대로 의과대학 설립의 타당성 여부를 판단하는 설립기준이 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보다는 역시 1970년대부터 의과대학장들의 모임을 통해 우리나라 의학교육의 전반적 수준 향상을 위한 논의 역사의 연장선상에서 이루어졌다고 보아야 한다. 특히 1980년대 이후 미국이나 영국, 호주 등에서 21세기 사회에 맞는 새로운 의학교육 개혁 노력들과 함께 평가인증제도를 성공적으로 시행하고 있었던 이들 나라들에서의 경험사례 또한 우리나라에 이 제도의 도입 필요성을 주장하게 된 주요 배경이기도 하다[5,6].
이즈음 당시 문교부 또한 우리나라 의학교육 수준과 교육여건 개선을 위해 어떤 형태로든지 의과대학 교육 평가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실제로 1981년 문교부는 국내 대학의 의예과, 의학과, 간호학과, 치의학과, 한의학과 등에 대한 실태를 연구보고서 형식으로 발간한 바 있다[7]. 이 평가는 평가대상 대학의 자체 평가보고서와 타 대학 교수들의 현지 방문평가로 이루어져 나름 현재의 평가인증형태를 취하기는 했으나 결과 활용에 있어서 각 학과의 교육내용과 교육환경 수준을 A, B, C 세 등급으로 나누어 판단하는 정도의 실험적 평가였다. 1993년에도 ‘한국대학교육협의회’(Korean Council for University Education, ‘대교협’)에서 한국의학교육학회와 학장협의회 관계자들에게 의뢰하여 전국 23개 의과대학이 참여한 의과대학 교육프로그램 평가연구를 실시했으나[8], 이 평가 또한 의과대학 교육프로그램의 인증 여부를 판단하는 진정한 의미의 평가인증은 아니었다.
기록상 우리나라에서 의과대학 평가, 특히 평가인증의 필요성이 글을 통해 처음으로 제기된 것은 1990년 Lee [9]가 한국의학교육학회지 2권 1호에서 “의과대학 평가제도 있어야 한다”라는 제목의 짧은 논단을 발표하면서부터라고 할 수 있다. 이 글에서 Lee [9]는 우리나라 의학교육의 표준화와 교육평가, 그리고 당시 미국과 프랑스 등 외국의 사례를 들어 평가인증제도의 필요성을 주장한다. 이 주장에 근거한 것인지 아니면 우연한 일이었는지는 몰라도 다음 해인 1991년 11월 한국의과대학장협의회가 전남 광주에서 개최한 협회 제22차 학술세미나에서 “의과대학 신임평가제도”라는 주제의 발표와 토론을 갖는다. 이 세미나에서 발표된 Kim [10], Choi [11], 그리고 Kim [12]의 발표내용은 역시 1991년 한국의학교육학회지 3권 2호에 소개된다. 이 세미나를 시작으로 학장협의회는 1992년 2월과 6월, 그리고 11월에 연이어 세미나를 개최하고 의학과 신임평가의 구체적 영역에 해당하는 교육과정과 교수, 학생, 그리고 대학재정과 시설분야 등에 관한 평가에 대해 발표와 논의를 이어간다.
이 시기에 학장협의회가 이처럼 집중적으로 의과대학 신임평가에 관한 논의를 했던 가장 큰 현실적 이유는 역시 신설 의과대학 문제와 무관하지 않다. 이후로도 계속 의과대학 신설이 이어질 것을 우려한 의료계, 특히 한국의과대학장협의회는 실제로 1992년 6월 세미나 기간 중 긴급 전체회의를 소집하고 의과대학 신설을 반대하는 결의문을 채택한다. 그리고 대한의사협회를 포함한 주요 의료단체 연명으로 이를 교육부에 제출한다. 이 결의문에는 1970년대 이후 급격한 경제성장으로 의료수요 또한 크게 상승된 상태에서 의료인력과 시설을 늘리기 위한 사회적 상황인 것은 이해를 하지만, 당시 기존 의과대학들도 제대로 의학교육을 수행하는 일에 적지 않은 어려움이 있는 상황에서 의과대학을 계속 신설하는 것이 부당하다는 것과 의학교육의 내실화를 위해 기존 의과대학들에 대한 교육도 재평가하고 이를 바탕으로 의과대학 신설이나 정원문제 등 장기적인 의료인력 수급문제를 논의하자는 제안을 담고 있다[13]. 결과론이지만 당시 의과대학 신설문제가 우리나라 의학교육 평가인증제도 도입 노력의 큰 계기가 된 것은 물론, 이런 노력에 의료계 여러 단체들로부터 지지와 지원을 얻어 내는데 한몫을 한 것은 분명하다.
한국의학교육 평가인증제도 도입과 발전의 직접적 배경
의학교육 평가인증이 의학교육의 사회적 책무성을 높이고 의학교육의 수준을 향상시키는 데 꼭 필요하다는 이론적, 역사적 배경은 그것이 어떤 계기를 통해서건 모든 의과대학들이 참여하는 현실적인 ‘제도’로 도입되지 않는 한 그저 이상적인 희망에 머물러 있을 수밖에 없고 따라서 그 일이 실현되는 데는 많은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다. 의과대학 평가인증제도를 제일 먼저 도입한 미국의 경우, 미국의과대학협회(Association of American Medical Colleges, AAMC)와 미국의사협회(American Medical Association, AMA)가 공동으로 의과대학 평가인증기구인 Liaison Committee on Medical Education (LCME)를 만든 것이 1942년이다. 당시 제2차 세계대전을 치르고 있던 미국 연방정부가 부족한 군의관 충원을 위해 의과대학 교육연한 단축과 의과대학 입학정원을 늘리려는 계획을 발표하자 의료계에서는 의학교육 질 저하를 우려하며 반대에 나섰고 이 일을 계기로 의과대학 평가인증제도를 도입하게 된다[14]. 그러나 초창기에는 역시 강제성이 없는 LCME의 평가인증에 많은 대학들이 참여하지 않았고, 몇몇 대학들만 대학 홍보차원에서 이 평가에 참여하는 수준이었다고 한다. 결국 미국의 의학교육 평가인증제도도 1970년대 중반부터 서서히 제 기능을 발휘하기 시작했고, 다른 선진국들도 1980년대 이후에 차차 의학교육 평가인증제도를 운영하게 된다.
앞서도 잠시 언급했지만 우리나라 의학교육 평가인증제도 도입의 배경을 1980년대와 90년대 초에 정부가 집중적으로 의과대학 신설을 허용하는 것에 대한 의료계의 반대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는 견해가 많다. 물론 이 일이 의료계, 특히 의학교육계가 계속해서 주장해 오던 의과대학 평가인증제 도입 필요성 논의에 불을 지핀 계기가 된 것은 사실이지만, 그러나 평가인증제도의 성격상 이 일을 곧 그 직접적인 배경으로 보는 것은 맞지 않다. 그보다 이즈음 의료계로 하여금 ‘자율적’ 의학교육 평가인증제 도입을 서두르게 한 더 직접적인 배경은 대교협에 의한 대학평가라고 보아야 한다. 즉 1992년부터 대교협이 대학종합평가와 별도로 ‘학과별 평가’를 시작한 것이 중요한 배경이다. 1992년 물리학과와 전자공학과에 대한 학과평가를 시작한 대교협이, 그러나 당시 전국 4년제 대학에 개설된 학과가 1,000개도 넘는 상황에서 이들 모든 대학 학과를 평가한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래서 대교협은 1994년부터 정부차원의 학과평가계획을 수정한다. 즉 국제경쟁력과 관련이 깊거나, 기초과학 내지 기초학문분야인 경우, 그리고 의료 관련 학과들처럼 전문인 양성이나 자격증과 관련된 학문분야 학과들을 우선평가대상으로 하는 학문계열별 학과평가를 실시하기로 하고, 1995년에 “1996년도 학과평가인정제 시행을 위한 의학, 치의학, 한의학 학과편람”을 발표한다[15]. 이를 근거로 대교협은 1996년 의학계열 학과인 의학과, 치의학과, 그리고 한의학과에 대한 평가를 실시하게 된다.
그러나 1996년의 대교협 의학계열 학과평가는 교육과정 내용이나 교육환경 등을 평가해서 어느 수준 이상이 되면 법적으로, 사회적으로 인증해 주는 소위 ‘절대평가’가 아니라 어느 대학이 우수한 대학인지를 발표하는 정도의 ‘상대평가’였다. 그러다보니 그나마 교육프로그램이나 교육환경이 좋은 대학들은 우수 대학에 선정되기 위해 평가에 더 열심히 참여하는 반면, 정작 교육여건이 적절한지를 판단 받아야 할 대학들은 소극적으로 참여하는 상태여서 인증을 위한 평가와는 거리가 멀었다. 이점이 바로 의료계가 서둘러 평가인증을 위한 절대평가형식의 자율적 의학교육 평가기구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이를 위해 본격적인 노력을 시작하게 된 계기다. 역설적이지만 아무튼 당시 대교협에 의한 의학과 평가는 의료계의 자율적 의과대학 인정평가제도 도입에 결정적 역할을 한 셈이다.
1980년대에만 11개 의과대학이 신설되고 1990년대에 들어서도 정부의 의과대학 신설계획이 이어지는 상황에서 의학교육의 표준화 내지 전반적 발전과는 거리가 먼 대교협 평가까지 경험한 의료계, 특히 의과대학장협의회를 포함한 의학교육 관련 단체들은 일종의 위기감마저 느끼게 된다. 어떻게든 우리나라 의학교육을 살려야 한다는 생각을 한 학장협의회와 의학교육학회는 의학교육에 관한 정부정책 논의와 대안 제시 등을 위한 의료계 내 협의체 구성을 제안한다. 이렇게 해서 1996년 4월 대한의사협회의 적극적인 주도로 대한병원협회, 대한의학회, 의사국가시험원, 그리고 학장협의회 등 9개 단체 대표가 참여해서 만든 것이 ‘한국의학교육협의회’다. 그리고 이 협의회에서의 논의와 여러 가지 준비과정을 거쳐 1998년 7월에 발족된 기구가 ‘한국의과대학인정평가위원회’이다. 그 사이 대한의사협회는 1996년 맹광호에게 의뢰하여 “의과대학 신임제도 개발연구”를 수행했고[16], 학장협의회와 한국의학교육학회는 1997년 11월 전국 의과대학 관계자들이 참석한 의학교육 합동학술대회에서 자율적 의과대학 인정평가제도 도입을 결의한다.
이런 과정을 거쳐 출범한 한국의과대학인정평가위원회가 1996년 대교협 평가에서 제외되었던 10개 신설 의과대학을 대상으로 의료계 스스로 자율평가를 실시한 것이 1999년의 일이다. 역시 강제성이 없는 자율적 참여에 의한 평가여서 그랬겠지만 실제로는 2개의 신설 국립의과대학이 불참하여 8개 대학에 대해서만 평가가 수행되었다. 그래도 이 평가가 한국의학교육평가원의 전신인 한국의과대학인정평가위원회에 의한 최초의 자율평가였다는 점에서 1999년을 한국의학교육평가원의 시작 연도로 정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때의 평가가 인증 여부를 판단하기 위한 평가가 아니라 2000년부터 실시하기로 한 제1주기 평가에 대비한 일종의 자문평가였기 때문에 차라리 인정평가위원회 설립연도인 1998년을 한국의학교육평가원의 설립연도로 보아야 한다는 견해도 없지 않다.
한국의과대학인정평가위원회는 2003년에 명칭을 한국의학교육평가원으로 변경했고, 한국의학교육평가원은 2004년 보건복지부의 승인을 받아 독립 법인체가 된다. 여담이지만 한국의학교육평가원 설립 당시의 정식 명칭은 ‘한국의학교육ㆍ평가원’이었다. ‘의학교육’과 ‘평가’의 문제를 동시에 다룬다는 취지에서다. 지금도 그대로 사용하고 있는 한국의학교육평가원의 영문 이름이 Korean Institute of Medical Education and Evaluation으로 Medical Education과 Evaluation 사이에 ‘and’가 들어있는 것이 바로 저런 이유 때문이다. 현재 한국의학교육평가원이 거의 전적으로 의사양성교육 평가에 관한 일을 하는 점을 고려하여 영어 명칭에서 아예 and라는 단어를 빼자는 의견도 제기되었지만 아직 그대로 사용되고 있다.
한국 의학교육 평가인증제도 도입 초창기 활동
“시작이 반”이라는 말이 있다. 그만큼 무슨 일이나 초기 단계에 잘 시작하지 않으면 그 일이 발전해 가기 어렵다는 뜻이다. 이런 관점에서 한국의학교육평가원의 오늘이 있기까지 간과해서는 안 되는 일이 ‘한국의과대학인정평가위원회’ 사업을 위한 준비와 그 초기 활동이다. 무엇을 한국의학교육평가원의 중요한 초기 활동으로 보아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관찰자의 주관적인 견해가 있을 수 있지만, 객관적으로 볼 때 역시 내부적으로는 평가인증에 필요한 기준개발과 실제 평가를 위한 운영체제 준비, 그리고 외부적으로는 이 제도의 공(公)적 인정과 평가인증 관련 국제교류를 위한 노력이었다고 할 수 있다[17].
앞서도 언급했지만 우리나라 의과대학 자율 평가인증제도의 시작은 기본적으로 1996년도 대교협의 의학과 평가에 기초한다. 평가내용이나 방법 모두 이때의 평가방식을 근거로 했기 때문이다. 즉 인정평가를 평가대상 대학의 자체평가 연구보고서에 의한 서면평가와 평가 주체가 구성한 평가교수단에 의한 방문평가로 구성하고 있다든지, 평가항목을 교육 투입-산출모형에 바탕을 둔 5개 영역별로(원래 대교협이 정한 학과평가영역은 교육목표 및 교육과정, 학생, 교수, 시설 및 설비, 그리고 행・재정영역과 대학원영역이었으나 의과대학 자율평가에서는 대학원영역을 제외함) 도출하고 있는 점 등이 그것이다.
그러나 한국의과대학 인정평가위원회가 1999년 10개 신설 의과대학을 대상으로 최초 자율평가를 시작할 때 대교협의 학과평가항목과 기준을 그대로 사용한 것은 아니다. 대교협의 학과평가와 달리 의학교육 특성에 맞도록 평가문항 숫자와 내용을 대폭 수정했다. 즉 1996년 대교협에 의한 의학과 평가에서는 다른 학과평가에서 사용한 거의 공통적인 성격의 평가항목이 다수 포함되었기 때문에 평가문항도 총 100개 수준이었지만, 1999년 의과대학인정평가위원회의 평가에서는 우선 의과대학 교육성격에 맞는 항목 50개 수준으로 크게 조정했다. 처음으로 시작하는 자율평가인 만큼 의과대학이 갖추어야 하는 최소한의 교육과정과 교육환경에 대한 항목만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특히 인정평가의 목적에 맞도록 평가대상 대학이 평가결과 인정을 받기 위해서는 특정 평가항목에 대해 반드시 일정 수준에 도달하도록 하는 소위 ‘필수항목’(must item)을 포함했다. 즉 평가결과에서 인정을 받으려면 총 50개 평가항목 중 16개 항목을 반드시 충족하도록 한 것이 특징이다. 의학교육 특유의 교육과정과 여건들을 고려한 우리나라 의과대학 평가항목 개발을 위해 당시 의과대학인정평가위원회는 미국과 호주의 의학교육 평가인증기관인 LCME와 Australian Medical Council의 평가항목과 기준을 많이 참조했다[18,19]. 특히 미국과 영국의 평가인증제도 장점들을 중심으로 개발된 호주의 평가기준이 큰 도움이 되었다. 이렇게 해서 개발된 평가항목을 가지고 2000년부터 2004년까지 제1주기 자율적 의과대학인정평가를 실시했다.
제1주기 평가에 이어 제2주기(2007–2011) 및 post-2주기(2012–2018) 평가를 마친 한국의학교육평가원은 2019년부터 WFME의 국제표준기준(WFME Global Standards)을 대폭 반영한 소위 ‘ASK2019’ (Accreditation Standards of Korean Institute of Medical Education and Evaluation 2019) 평가기준을 사용하여 지금 네 번째 주기에 해당하는 평가를 진행하고 있다. 평가주기가 바뀔 때마다 평가기준이나 항목 수가 증가하고 기준 또한 많이 상향된 것은 두말할 나위도 없는 일이다[20]. 이는 그만큼 주기적인 평가가 이어지면서 우리나라 의과대학들의 교육수준이나 교육환경이 향상되어 온 것을 의미한다고도 할 수 있다.
둘째로, 의과대학인정평가위원회가 초창기에 심혈을 기울인 일 중에는 의료계의 자율적인 평가가 사회적, 공적 인정을 받을 수 있도록 법인 설립과 함께 법적, 제도적 뒷받침을 받기 위한 노력을 시작한 일이다. 이런 뒷받침이 없는 상태에서는 제도의 지속적인 발전이 어렵기 때문이다.
한국의과대학인정평가위원회 발족의 산파역을 담당했던 한국의학교육협의회는 1996년 설립 이후 여러 차례 회의를 통해 의과대학 평가사업의 독립성과 효율적 활동을 위한 독립기구의 설치와 법인화의 필요성을 논의하고 2002년 5월 회의에서 평가 전담기구의 명칭을 ‘한국의학교육평가원’으로 하는 것을 결정한다. 결국 2003년 11월 대전 유성호텔에서 한국의학교육평가원 창립총회를 개최했으며 2004년 2월 27일 보건복지부로부터 법인등록 허가를 받기에 이른다.
사실 설립 당시 한국의과대학인정평가위원회는 자체 사무실도 없이 대한의사협회 학술국의 업무 지원을 받고 있던 상황에서 점차 확대되어가는 업무를 위한 전담기구의 설립이 시급했다. 다행히 당시 인정평가위원회에 관여하고 있던 교수들이 학장협의회와 의학교육학회에 모두 적극 관여하고 있던 사람들이어서 당시로서는 사업을 수행하는 데 별 어려움이 없었지만 향후 제도의 발전을 위해서는 반드시 독립된 전담기구로 정착을 해야 했기 때문이다. 이 경우 독립적인 기구로 할 것인지 아니면 의과대학장협의회나 한국의학원 같은 기존 의료단체 산하에 둘 것인지에 대해서도 의견이 적지 않았다.
2004년 법인등록과 전국 41개 의과대학에 대한 제1주기 인정평가를 성공적으로 마친 한국의학교육평가원은 자신감을 갖고 2007년부터 시작되는 제2주기 평가를 준비하는 한편, 정부로부터 자율적 평가인증기관 인정을 받기 위한 본격적인 노력을 시작한다.
다행히 이즈음 의과대학 평가인증과 관련한 정부부처인 보건복지부와 당시 교육과학기술부에서도 한국의학교육평가원의 자율적 제1주기 평가, 그리고 전문분야 학문계열 학과에 대한 평가와 인정이 세계적인 추세인 것에 인식을 같이 하고 전문분야 평가인정기구 지정에 대한 관심과 관련 규정 마련에 나서게 된다. 이후 교육과학기술부가 2011년 Lee [21]에게 의뢰하여 “학문분야(프로그램) 평가·인증의 정책적 기본방향 연구”를 수행하게 한 것이라든지, 국회에서도 의과대학 평가인증제도 법제화의 필요성이 거론되기 시작한 것[22] 등이 그 좋은 예다.
한편, 한국의학교육평가원은 제1주기 평가를 진행하면서 동시에 우리나라에서의 의과대학 인정평가활동을 국제사회에 알리는 일에도 박차를 가한다. 2003년 3월에는 덴마크 코펜하겐에서 열린 WFME 세계대회에 참여해서 우리의 자율적 의과대학 교육평가활동을 소개하고[23], 2004년 12월에도 싱가포르에서 열린 제2회 아시아-태평양 의학교육 컨퍼런스에 참석하여 역시 한국에서의 의과대학 인정평가 내용을 발표한다[24]. 제1주기 평가를 끝내고 곧장 제2주기 평가준비에 들어간 한국의학교육평가원은 2006년 우리나라 의과대학 인정평가 과정과 평가항목 및 기준 등을 소개하는 영문 책자 “The assessment and accreditation of medical education programs in Korea”를 발간하여 국내외 관련 기관들에 배포하기도 했다[25]. 나름 많은 시간과 노력을 들여 만든 84쪽 분량의 이 한국의학교육평가원 소개 영문 책자에 관해서는, 그러나 웬일인지 어디에도 그 기록이 남아있지 않다.
한국의학교육평가원이 WFME로부터 국제적인 의학교육 평가인증기관으로 인정을 받은 것은 2016년의 일이지만, 이미 초창기 의과대학 인정평가제도 도입을 준비하던 때부터 한국의학교육평가원은 한국의학교육 평가인증활동을 알리고 국제적 인정을 받기 위해 적잖은 노력을 했음을 보여준다.
초창기 한국 의학교육 평가인증활동의 성과와 의미
우리나라 초창기 의학교육 평가인증활동의 성과와 의미는 역시 2004년에 끝낸 제1주기 의과대학인정평가 결과에서 찾아볼 수 있다. 내부적으로는 우선 자율평가를 위해 의료계가 처음으로 개발한 평가항목의 적합성이나 기준의 적절성을 점검해보는 계기가 되었고, 평가대상들의 반응을 확인하는 좋은 계기였다[26].
제1주기 의과대학 인정평가사업의 가장 중요한 성과는 무엇보다 당시 41개 국내 모든 의과대학들이 제1주기 평가에 참여했다는 사실이다. 이 제도가 법적인 뒷받침을 받는 것도 아니고 따라서 전혀 강제성이 없는 제도이기 때문에 모든 대학이 반드시 평가에 참여할 의무도 없는 상황에서 모든 대학이 평가를 받았다는 사실은 향후 이 제도의 발전에 가장 희망을 주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이 제도에 대한 대학구성원들, 특히 교수들의 반응 또한 매우 고무적이었다. 당시 제1주기 평가에서 대학 자체평가나 현지 방문평가 위원 등으로 활동한 교수 314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결과를 보면 우선 조사대상 교수들의 80.7%가 의과대학 인정평가제도를 의학교육의 질 향상을 위해 꼭 필요한 제도라고 인식하고 있었다[2]. 이들은 이런 대학 평가제도가 자신이 속한 대학의 교육 전반을 주기적으로 점검하는 좋은 기회가 될 뿐 아니라 구체적으로는 교육과정의 강점과 약점을 파악하고 의학교육의 중요성에 대해 대학 구성원의 인식을 제고하는 데 큰 도움이 된다고 했다. 특히 의과대학 교육발전을 위한 대학본부 및 재단의 지원을 얻어내는 일에 있어서 가장 효과적이라고 했다. 이 같은 교수들의 의견은 당시 우리나라의 의학교육과정이나 교육환경이 그만큼 부족했다는 점을 지적하는 일이기도 하다. 실제로 제1주기 평가결과를 바탕으로 한국의학교육평가원이 분석한 5개 평가영역에서의 우리나라 의과대학 교육현실이 이를 잘 말해주고 있다. 즉 의과대학의 ‘교육목표 및 교육과정’ 영역에서 보면 대부분의 대학이 지나친 강의 중심 교육에 치우쳐 있어서 학생들의 자율적 문제해결능력을 기르는 일에 한계가 있다든지 학생지도와 장학금 지급상태 등을 평가하는 ‘학생’ 영역에서 대체로 그 수준이 열악할 뿐 아니라 무엇보다 대학 간 차이가 매우 심했다. 학생 1인당 평균 장학금 액수가 대학에 따라 15만 원에서 200만 원 수준까지 차이가 나는 것이 그 좋은 예다.
교수인력과 교육·연구실태를 점검하는 ‘교수’ 영역, 대학의 교육환경을 평가하는 ‘시설설비’ 영역, 그리고 대학의 행정 및 재정실태를 파악하는 ‘행정 및 재정’ 영역에 대한 평가에서도 적잖은 미비점과 대학 간 차이를 발견할 수 있었다. 특히 기초의학을 담당하는 교수 수에 있어서 대학에 따라 13명에서 85명까지 차이를 보였고, 부속병원 숫자에 따른 차이이기는 하나 임상교수 수도 15명에서 700명이나 되는 대학이 있었다. 끝으로 의과대학 교육의 질적 향상을 위해 매우 중요한 투입요인인 ‘행정 및 재정’ 영역의 경우, 학장의 권한이나 예산운영 등에 있어서 적잖은 문제가 있어 보였다. 실제로 제1주기 평가결과 9개 대학이 ‘조건부 인정’을 받았다. 그러나 당시에는 평가결과에 대한 아무런 공적 조치를 취할 수 없는 상태였기 때문에 단지 이들 대학들로 하여금 제2주기 평가에 대비할 수 있도록 몇 가지 부족한 점에 대해 조언해 주는 성격으로 마무리해야 했다. 실제로 이때 조건부 인정을 받은 일부 대학 운영자들로부터는 불만도 없지 않았다. 그러나 평가 후 교수들이나 학생들로부터는 이를 계기로 자신들의 의학교육 여건이 개선될 수 있어 좋았다는 의견이 많았고, 특히 조건부 인정을 받은 9개 대학 중 5개 대학은 이후 부족한 부분들을 보완하여 ‘완전 인정’을 받았다. 이 같은 제1주기 의과대학평가 결과는 제2주기 이후 추가적인 평가항목 개발이나 기준의 수준향상에는 물론 우리나라의 의학교육 평가인증제도를 국제적인 수준으로까지 끌어올리는 데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고 봐야 한다.
무엇보다 이 같은 한국의학교육평가원의 초창기 활동은 정부 교육당국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했고, 이 일은 결국 최소한 전문직 분야 학과들에 대한 자율적 평가인증제도의 필요성을 확인하는 계기가 되었다는 점에 큰 의미가 있다.
결 론
이 논문은 우리나라 의학교육 평가인증 역사 20년 가운데 주로 한국의학교육평가원이 독립법인체가 된 2004년 이전의 역사에 관해 고찰하는 것을 목적으로 했다. 그것은 1998년 의료계 단체들의 합의에 의해 설립되어 1999년 처음으로 자율적인 의과대학 평가활동을 시작했던 한국의과대학인정평가위원회가 독립기구가 아닌 실무위원회 성격이었고, 따라서 이때를 전후한 시기의 의학교육 평가인증제 도입을 위한 의료계의 초창기 노력이 종합적으로 잘 정리되어 있지 못하다는 인식을 바탕으로 한 것이다. 이런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이 시기에 발표된 주요 논문들과 의학교육 관련 단체들의 발전사 속에 기술되어 있는 우리나라 의학교육 평가인증제도 도입 노력의 배경과 활동을 종합적으로 재조명함으로써 향후 이 제도를 더욱 발전시켜 나가야 할 한국의학교육평가원의 역사 기술과 발전전략 수립에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고자 한 것이 이 논문의 목적이다.
의과대학 교육에 대한 주기적인 평가인증의 필요성은 의학교육 자체가 지향하고 있는 의학교육의 사회적 책무성(social accountability) 때문이다[4]. 즉 모든 의과대학들은 사회가 요구하는 수준의 의사를 양성해야 하는 것이 가장 큰 목적이어야 하고, 따라서 의과대학 평가인증은 단지 평가대상 의과대학들이 그때그때 이런 수준의 의학교육을 하고 있는지 여부를 판단해서 공개하는 일에 지나지 않는다. 이런 측면에서 보면 우리나라에서의 의학교육 평가 내지 평가인증 도입 노력의 역사는 곧 우리나라에 서양의학이 들어온 이후의 의학교육 역사와 맥을 같이 한다고 할 수 있다. 이 논문에서 우리나라 의학교육 평가인증제도 도입의 배경을 설명하면서 한국의학교육평가원 설립 이전의 의학교육 발전을 위한 의학교육계의 노력에 대해 먼저 잠시 언급한 이유다. 그러나 의학교육평가나 평가인증이 실제 제도화되는 것은 이런 당위성이나 시간이 흐름에 따라 저절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제도도입이 불가피한 어떤 계기가 있어야 한다. 이 논문에서는 우리나라에서 자율적인 의과대학 평가인증제 도입이 불가피하다는 판단을 하게 된 계기를 1996년 대교협에 의한 의학과 평가로 보고 있다. 정부기관에 의한 강제적 의과대학 평가가 진정한 평가인증 정신을 구현하고 있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에 자극을 받은 의료계가 합심하여 당장 그해부터 자율적 의과대학 인정평가제도 도입 노력을 시작한 것이 1998년 한국의과대학인정평가위원회의 설립이다. 이런 과정을 거쳐 1999년 10개 신설 의과대학들을 대상으로 하는 우리나라 최초의 자율적 인정평가를 수행하고 이어서 2000년부터 2004년까지 전국 41개 의과대학 전체를 대상으로 제1주기 의과대학 인정평가를 시행한다. 그리고 제1주기 인정평가의 성과와 향후 이 제도의 발전을 위한 몇 가지 과제들을 제시하는 연구보고서를 발간하기도 한다[17]. 특히 향후 제도의 발전을 위한 과제로, 이 보고서는 의료계의 자율적 의과대학 인정평가활동이 정부나 사회로부터 공적 인정을 받도록 노력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제1주기 평가를 마치던 2004년에 한국의학교육평가원이 우선 법인단체로 독립을 했다는 것은 의미가 크다. 1주기 평가경험을 통해서 얻은 결과를 더욱 발전적으로 이어가기 위해서는 이제 더 이상 실무위원회 수준에서 몇 사람의 노력에 의해 이 제도를 이끌어가는 것은 어려운 일이기 때문이다. 특히 한국의학교육평가원이 2014년 교육부로부터 ‘고등교육 프로그램 평가인증기관’으로 인정받고, 2016년에는 WFME로부터 국제적 의학교육 평가인증기관으로 인정받은 것은 이제 한국의학교육 평가인증이 국내외적으로 높게 평가받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 매우 뜻깊은 일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동시에 한국의학교육평가원이 장차 평가인증제도의 유지 발전을 위해 더 많은 노력을 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의과대학에서의 기본의학교육과정은 물론 졸업 후 수련과정과 의사 평생교육과정의 선진화를 통해 우리나라 의학교육의 수준을 향상시키고 이를 통해 국민건강을 책임지는 의사 양성을 위한 한국의학교육평가원의 역할은 앞으로 더욱더 커질 수밖에 없다[27]. 이를 위해서는 무엇보다 좀 더 안정적인 운영을 위한 재정과 평가인증 전문인력의 확보가 필요하다. 그러나 이 일은 한국의학교육평가원만의 노력으로는 어려운 일이다. 여기서 한국의학교육평가원은 초창기 의과대학 평가인증사업이 당시 의료계 유관단체들, 특히 대한의사협회와 의과대학장협의회, 즉 지금의 한국의과대학ㆍ의학전문대학원협회, 그리고 한국의학교육학회의 전폭적인 참여와 지원을 받았던 사실을 명심할 필요가 있다. 80년 가까운 역사를 가진 미국 의학교육 평가인증기구 LCME의 경우, ‘의학교육의 질 향상’은 지금도 이 기구를 공동으로 설립, 운영하고 있는 AMA와 AAMC 지도자들의 핵심가치가 되고 있고, 이것이 바로 LCME 발전의 원동력이 되고 있다.
물론 독립적인 법인체 지위를 확보한지 15년이 지난 지금, 한국의학교육평가원은 어떻게든 스스로 그 목적사업을 수행해나갈 수 있는 능력을 키워가야 하겠지만, 의학교육 평가인증사업이 결국 의학의 사회적 책무성을 가장 확실하게 실천하는 일이며, 따라서 이 일은 우리나라 의학교육, 아니 의학 자체가 궁극적으로 지향해야 하는 목적사업임을 인식하고 의료계 전체의 지지와 협력을 이끌어내도록 계속 노력해가야 할 것이다.